2024/10 49

분꽃이라는 이름

분꽃이라는 이름 / 김신타 낮 동안은 입 다물고 있다가 어둠과 무언의 대화 나누는 침묵의 긴 꽃대궁 분꽃처럼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시간의 대부분을 대화가 아닌 묵언수행으로 보내야 하리라 이름이 그인 것도 아닌데 이름 때문에 우리가 그의 참모습 알지 못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몸 마음과 우리 자신을 일심동체로 생각하는 것은 이름 때문이 아니라 무명 無明을 벗지 못한 탓이며 몸 마음과 나, 잠시 함께하지만 눈에 보이는 몸이나 몸으로 느껴지는 마음은 내가 아니라 대상일 뿐이다 나는 오감으로 지각되지 않는 생각으로 인식되는 주체이며 신과 함께하는 영원함이므로

詩-깨달음 2024.10.23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이유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이유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가시밭길을 헤치고 신에게 다가오게 한 다음, 신의 뜻에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인간 대신 신의 뜻에 무조건 복종하는 로봇을 만들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마디로 말해, 전지전능한 신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런 재미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것이다. 자유의지를 부여한 다음,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슬픔과 고통을 통해, 인간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를 스스로 포기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자유의지 대신 (신으로부터) 소리 없이 흐르는 영감을 스스로 알아채고, 기쁨 속에서 신의 뜻에 따르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게 신의 목표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신 혼자만의..

깨달음의 서 2024.10.22

우리 몸은 우주 만물에 포함된다

우리 몸은 우주 만물에 포함된다 우리 저마다의 몸은 우주 만물에 포함되는, 눈에 보이는 수많은 물질 존재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앞에 보이는 물잔과 내 몸이 다르지 않다. 다만 파도와 같은 삶을 헤쳐가면서, 늘 나와 함께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애착이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애정을 쏟았던 반려견도 떠나보내야 하는 때가 오는 것처럼, 더 많은 애정을 쏟아부었지만 우리 몸도 땅에 묻거나 불에 태워야 하는 때가 오는 것이다. 그러한 때 나는 이미 몸에서 벗어나 영혼이 되었기에,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내 몸을 없애게 된다. 격식과 예의를 갖춘다는 점이 다를 뿐, 반려견 사체를 없애는 것과 다를 바 하나 없다. 이처럼 나와 내 몸은 서로 다른 운명을 가진, 즉 갈 길이 서로 다른..

깨달음의 서 2024.10.22

'허상의 나'가 아닌 나

'허상의 나'가 아닌 나 '허상의 나'가 아닌 나, 또는 '허상의 나'를 벗어난 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체성의 나'가 아니라, 이게 바로 진짜 나 즉 '전체성의 나'이다. 개체성의 나란 너와 나로 나누어진,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라고 생각하고 느끼는 나, 즉 다른 사람과는 분리된 채 자신의 몸 하고만 함께한다고 생각되는 나를 말한다. 그러나 분리된 몸과 내가 함께한다고 해서, 몸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분리된 나란 없다. 몸은 분리되어 있을지라도 '나'라는 존재는 다른 존재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몸과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허상이 아닌 나' 즉 '실재의 나'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참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허상인 나와 함께..

깨달음의 서 2024.10.22

기차 안에서의 단상

기차 안에서의 단상 같은 기차에 탄 남모르는 사람조차, 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게 아니라 고마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덕분에 내가 기차를 탈 수 있고, 나아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 혼자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르는 사람들을 소 닭 쳐다보듯 할 게 아니라, 마음속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살아갈 수 있음이다.'라는 생각을 평소에 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자신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날 것입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함께 우리 마음도 많이 가벼워질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우리 몸을 비롯한 지상에 있는 대상이 환상인 게 아니라, 대상을 지각하는 몸과 마음을 나라고 착각하는 게 곧 환상이다. 오감에 의해 지각되는 몸이나, 몸을 통해 지각되는 마음을 나라고 믿는 우리의 관념이 곧 환상이요 허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감으로 지각되는 몸과, 몸과 함께하는 의식에 의해 지각되는 마음을 오랜 세월 동안 나 자신으로 생각해 왔다. 저녁 어스름에 집에 찾아온 손님을, 우리는 어쩌다 다른 사람으로 잘못 보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손님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이지, 그 손님이 다른 사람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몸이나 마음을 우리 자신인 것으로 생각하는 게 환상이지, 우리 몸을 비롯한 지상에 있는 물리적 대상이 환상인 것은 아니다.그런데 붓다..

깨달음의 서 2024.10.21

부패와 발효

부패와 발효 / 김신타어제 보았던 기억을오늘 다시 꺼낸다면그것은 점점 시들어 가는냄새나는 열매가 될 것이다어제의 기억은 땅속에 묻어놓고눈을 들어 오늘을 다시 바라볼 때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며켜켜이 쌓여 숙성이 될 것이다어제 본 것어제 들은 것굳이 다시 꺼내지 않아도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잔상을 떠올리지 말자어제 보았거나 들었던 기억은사라지지 않는 잔상일 뿐이다어제 아름다웠던 것도아름답지 못했던 것도오늘 다시 그림을 그리자잔상을 곱씹을 게 아니라새로운 종이 위에새로운 기억으로 채색하자

신작 詩 2024.10.18

가을 소풍

가을 소풍 / 김신타 카페 옆 식물원에서 일행과 떨어져 혼자 구경하다가 차를 운전해야 하는 내가 안 보이자 다른 사람들은 지금 다 가는데 어디서 뭐 하고 있느냐며 조금은 짜증 섞인 전화가 왔다 상대방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있음을 알아챘으나 지금 가고 있는 중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는 이내 일행을 만나 함께 돌아왔다 집에 와서 다른 일 하는데 아까의 일이 생각나면서 사람이 짜증 낼 수 있다는 게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는 게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과 함께 혼자 피식하는 웃음이 났다 예전 같으면 현장에서 바로 뭘 그렇게 짜증 내느냐며 서운함을 참지 못했을 나인데 이제는 내 감정을 알아차렸을 뿐 아무런 흔들림 없이, 더 나아가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든다는 사실이 가을날 국화꽃처럼 향기롭다 눈에 보이지는 ..

신작 詩 2024.10.17

울적한

울적한 / 김신타 울고 싶은 마음을 나타내는 '울적한'이라는 단어가 아름답다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라는 제목의 노래에 나오는 "어떻게 내가 어떻게 너를 이후에 우리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이별일 텐데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사랑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포기하고 찢어질 것같이 아파할 수 없어 난" 이라는 구절이 끝내 내리는 빗물처럼 창밖의 나무를 적신다 "" 악동뮤지션 노래, 가사 부분 인용

신작 詩 2024.10.15

실재

실재 / 김신타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의 속에 있는, 껍데기와 알맹이처럼 가을날 씨앗주머니와 씨앗처럼 함께하면서도 하나의 운명이 아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영원할 것으로 순간순간 착각하게 되는 우리는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스스로 지워버린 채 태어났다 자신이라는 보물을 찾는 보물찾기 놀이를 하기 위하여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알지 못한다 알맹이인지 껍데기인지 씨앗인지 씨앗주머니인지 껍데기나 주머니가 아닌 속에 있는 씨앗이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봉선화 씨앗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실재이다 보이는 실상은 언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실재만이 영원한데 실상으로서 자신이 영원하기를 어리석은 꿈 여전히 꾸고 있다 보이는 실상은 반드시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실재가 곧 영원한 우리 자신의 모습임에도

詩-깨달음 2024.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