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 49

주체와 전체

주체와 전체 주체는 오직 하나뿐임을 알라. 그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인 것이다. 지상과 천상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는 뜻이다. 아울러 그러한 존재가 바로 신이기에 유대교를 비롯한 많은 유일신 종교가 탄생했다. 힌두교와는 달리 신이 없다는 불교도 마찬가지다.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해서 중생처럼 많은 부처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든 중생이 하나의 부처로 귀의하는 것일 뿐이다. 불교에서 과거에서부터 많은 부처가 있었다는 사상은 힌두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힌두교에 많은 신이 있는 것처럼 불교에서도 많은 부처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싫어하면서도 닮아 가는 게 우리 인간사(人間史)이다. 전체란 크기가 없다. 따라서 전체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한..

깨달음의 서 2024.10.10

색즉시공이 맞는 얘기일까?

몸 마음이 나라고 믿어오다가 깨달음을 얻어 내면에 있는 '허상의 나'로부터 벗어났을 때, 세상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외부 현실이 아니라 내면 의식일 따름이다. 그것을 우리는 내면 의식에서만이 아니라 외부 현실인 물질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불교 반야심경에 나오는 것처럼 '색즉시공'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인 색 色이 공 空한 게 아니라, 내면에서의 현상만이 텅 빈 공으로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나'라는 존재가 개체이며 따라서 전체와 분리되어 있다고 믿어오다가, 자신이 개체가 아닌 전체임을 깨닫고는 개체로서의 자신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허상의 울타리(=나)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즉 분리된 개체란 없고 전체만이 있다는 ..

깨달음의 서 2024.10.09

깊이 있는 바다, 노년의 삶

깊이 있는 바다, 노년의 삶 나라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물리적인 몸이 아니다. 나는 내면에 있는 무형의 존재이다. 겉으로 보이는 나는, 나를 감싸고 있는 몸일 뿐이다. 몸이란 내가 아니라,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내면에 존재하기에, 외부에서 나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나와 함께하는 몸을 나 자신으로 오인하는 어리석음을 범해 왔다. 그러나 내가 많은 시간을 몸과 함께 보낸다고 해서 몸이 곧 나인 것은 아니다. 내면에 있는 무형의 내가 주인이며 몸과 마음은 하인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게 바로 깨달음이고 거듭남이다. 나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를 일부러 망각한 채 지구상에 태어나, 몸과 함께 살아가면서 나 자신을..

깨달음의 서 2024.10.09

일심동체 一心同體

일심동체 一心同體 깨달았다고 해서 물리적으로 '나'라는 게 없어지는 건 아니다. 깨닫고 나면 내 몸이 없어지고 늘 오르내리던 산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몸 마음과 일심동체라고 믿어왔던 허상의 내가 없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허상의 내가 없어지더라도 실재하는 무형의 나는 여전히 그대로다. 몸 마음과 일심동체라고 믿어온 허상의 나는 눈에 보이고 오감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즉 실재하는 무형의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오감으로 느껴지지도 않기 때문에, 허상의 내가 사라지고 나면 몸을 비롯한 모든 물질적 대상 역시 사라지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런 착각을 다른 사람도 아닌, 허상의 나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즉 무아를 깨달은 선각자들이 예전부터 해왔으며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러..

깨달음의 서 2024.10.09

깨달은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깨달은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깨달았다고 해서 일상생활에서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또는 구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자신한테 닥쳐온 어떤 상황으로 인해서 자신이 행복하다거나 또는 불행하다는 등의 구분을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물리적인 구분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구분을 하지 않음이다. 자기한테 이익이 되고 안 되고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살아온 자기 경험이나 기억 등에 따른 두뇌 작용에 의해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면의 울림에 따라 의사를 결정한다. 지금 당장은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는 것 같은 일이 있어도 내면의 울림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이것이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이일 뿐 그 나머지는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데 행•불행을 구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깨달음의 서 2024.10.09

시작이 있을 뿐 끝은 없다 2

시작이 있을 뿐 끝은 없다 2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끝이 없을 뿐 시작은 있다. 시작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깨닫게 되면 그 깨달음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 깨닫기 이전에는 없었던 세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세계가 기존의 세계와 중첩되어 새롭게 시작된다. 기존의 세계와 중첩되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는 것일 뿐이다.그리고 깨달음 중에서도 가장 큰 깨달음인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과 다르지 않다. 이 물질계에서 오감으로 느껴지는 몸, 그리고 의식으로 느껴지는 마음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깨달음의 서 2024.10.09

무아와 깨달음

무아와 깨달음 무아라는 건 어떤 한계가 주어진 내가 없다는 뜻이다. 또는 어떤 범주 안에 들어있는 나란 없다는 뜻이다. 자신을 둘러싼 한계를 없애거나 또는, 스스로 자신을 집어넣었던 어떤 범주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에게는 깨달음을 얻었다, 대자유함을 얻었다는 느낌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이제는 자신을 둘러싼 아무런 울타리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한계나 범주라는 울타리가 자신을 보호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까지의 많은 노력으로 그러한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아라는 건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주위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둘러쳐진 울타리 즉 한계나 범주가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 갇혀 있었던 한계나 범주라는 울타리가 사라지니까, 제한되었던 '허상의 ..

깨달음의 서 2024.10.06

시작이 있을 뿐 끝은 없다

시작이 있을 뿐 끝은 없다 견성이란 시작일 뿐이다. 자신의 성품을 보았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시발점에 선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쉽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견성성불이라는 말도 맞는 말이다. 견성하면 그것이 곧 부처(붓다)가 되는 것이라는 뜻인 견성성불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바대로는 아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견성하게 되면 우리는 대부분 지금의 나와는 다른, 부처라는 어떤 다른 존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는 어떤 신비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성품을 보기 이전의 자신 즉, 중생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품을 본 사람이 바로 부처일 뿐이다. 그래서 견성성불이며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을 불교에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견성이란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자신의 ..

깨달음의 서 2024.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