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 20

또 다른 바람은 불고

또 다른 바람은 불고 / 김현희함께했던 여행바람은 여전히 그곳을 지나고지금은 겨울 바다문득 당신인 양얼굴을 스치고 가는한 줄기 바람지난 추억이 출렁이는나의 겨울은 지금백사장에 펼쳐진 설원인데저마다 흡족한 표정으로겨울 바다를 찾은 사람들또 다른 바람은 불고추억과 함께 찾아온 바다는새로운 추억을 낳습니다눈처럼 쏟아지는만남과 헤어짐 속에서도우리는 모두 순백의 사랑을 꿈꾸며오늘을 수놓습니다만언젠가 하나가 될 우리는 천천히하나씩 바다에 떨어지는아름다운 눈송이일 뿐입니다

봄 안부 / 강인호

봄 안부 / 강인호 당신 없이도 또 봄날이어서 살구꽃 분홍빛 저리 환합니다 언젠가 당신에게도 찾아갔을 분홍빛 오늘은 내 가슴에 듭니다 머잖아 저 분홍빛 차차 엷어져서는 어느 날 푸른빛 속으로 사라지겠지요 당신 가슴속에 스며들었을 내 추억도 이제 다 스러지고 말았을지 모르는데 살구꽃 환한 나무 아래서 당신 생각입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저 분홍빛이 그대와 나 우리 가슴속에 찾아와 머물다 갈 건지요 잘 지내 주어요 더 이상 내가 그대 안의 분홍빛 아니어도 그대의 봄 아름답기를 「좋은 생각」 2009년 4월호에서

홍어 / 이정록

홍어 / 이정록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년이다 양쪽 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우눈으로 웃는다 개업한 지 십팔년하고 십년 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저 늙은네는 곰삭은 젓갈이다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좆을 내온다 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 꽃잎 한 점 넣어준다 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 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 밤늦도록 홍어좆만 주룩럭거렸다고 만만한 게 홍어좆밖에 없었다고 얼음 막걸리를 젓는다 얼어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우리집 큰놈은 이제 쓸모도 없는 거시기만 남았다고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막걸리 거품처럼 웃는다 이정록, 2010

슬픈 도시락 / 이영춘

슬픈 도시락 / 이영춘 춘천시 남면 발산중학교 1학년 1반 류창수 고슴도치같이 머리카락 하늘로 치솟은 아이 뻐드렁 이빨, 그래서 더욱 천진하게만 보이는 아이, 점심시간이면 아이는 늘 혼자가 된다 혼자 먹는 도시락, 내가 살짝 도둑질하듯 그의 도시락을 훔쳐볼 때면 아이는 씩- 웃는다 웃음 속에서 묻어나는 쓸쓸함, 어머니 없는 그 아이는 자기가 만든 반찬과 밥이 부끄러워 도시락 속으로 숨고 싶은 것이다 도시락 속에 숨어서 울고 싶은 것이다. 어른들은 왜 싸우고 헤어지고 또 만나는 것인지? 깍두기조각 같은 슬픔이 그의 도시락 속에서 빼꼼히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늑대 / 김성수

늑대 / 김성수(金聖秀) 네 성껏 욕해다오 나는 가난한 네 목덜미를 움켜 핏줄기 솟구칠 때에도 너를 동정하지 않았다 나는 네게로 피에 주린 이빨을 세워 바람처럼 달려갔다 네 고통과 죽음 그런 높은 생각들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다만 길들여지지 않는 본능으로 척박한 이 땅에 침엽(針葉)처럼 살아내야 했을 뿐 그러나 가끔씩 서러움이 눈발처럼 쏟아지는 밤 네 피로 물든 툰드라 언덕에 비명같이 달빛 번지는 밤 싸늘한 한기 등줄 적시고 내가 삼킨 이름들이 무서리로 짖눌러 내리는 밤 어찌하지 나는... 먼 하늘 고개 젖혀 우-우- 몰수이 울어야 하는 이 밤...

[스크랩] 나의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나의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여성』3권 3호, 1938. 4) *출출이 : 뱁새 *마가리 : '오막살이'의 평안도 방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