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詩 323

믿음에서 깨어나다

믿음에서 깨어나다 / 김신타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닌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기쁨 주는 사람만이 아닌 내게 상처를 주는 존재도 나를 사랑하는 영혼이다 앎이 달라서도 아니고 처지가 달라서도 아니며 서로의 믿음이 다를 뿐이다 초월이란 공간적인 도약이거나 시간적인 이동을 뜻하지 않으며 자신이 가진 믿음을 뛰어넘는 일, 자신의 믿음을 초월한 곳에 기적이 있고 신비가 있으며 소망하는 현실이 거기 있다 믿음에서 깨어난 병아리 꽃처럼 소망하던 봄날이 눈발 속에서도 다가온다

신작 詩 2024.08.24

전기적 일상

전기적 일상 / 김신타 여름날 나는 선풍기를 튼 채 어싱 매트 위에다 발을 대고 충전하면서 휴대폰을 보다가 더러는 에어컨을 꿈꾸기도 한다 거리에 늘어진 전선은 사진 찍을 때마다 하늘에 까만 줄 긋고 집안에 들어온 전깃줄은 내 몸 주위를 감싸고 있다 전기 없는 세상을 사는 자연인의 삶도 있을 수 있으나 일상은 나도 모르게 전기적 세상이 되어 버렸다 밤중에도 가로등이 있고 아름다운 야경이 있으며 아궁이 불이 아니어도 따뜻한 겨울이 있다 난로에 주전자를 올려놓지 않아도 커피 포터에서 물이 끓어오르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아도 전기밥솥에서 저녁이 익어간다

신작 詩 2024.07.25

바램과 수용

바램과 수용 / 김신타 해가 났기에 빨래를 했더니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친다 장마 비가 쏟아지던 날 저녁 처마 밑에 널어놓은 빨래 이튿날 해가 반짝 든 적도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날씨에 대해 불평하고 짜증 내는 사람이 하릴없이 어리석어 보인다 바램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어나는 일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가 곧 무소불위(無所不爲) 능력의 신(神)이 아닐까

신작 詩 2024.07.24

탈장

탈장 / 김신타 샤워할 때마다 사타구니 옆에 툭 불거진 혹 같은 게 살짝 만져진다 서 있을 땐 탁구공처럼 느껴지고 누워있을 땐 아무런 흔적이 없다 외과일까? 비뇨기과일까? 국가암검진 차 들른 항문외과 가져온 대변 통을 내밀며 물어본다 사타구니 옆 혹이 혹시 어느 과인지 여기도 외과이니 일단 진찰받아 보란다 비교적 젊어 보이는 의사 탈장 脫腸으로 보인다고 한다 대도시 병원에서 수술받는 게 치료법이란다 알겠다며 집에 와 검색해 보니 그동안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 열 명에 한 명꼴로 걸리는 어쩌면 흔한 질병이기도 하다 얇아진 복벽을 창자가 뚫고 나와 생긴다는 주사나 약물이 아닌 외과 수술만이 치료법이라는 게 다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암 덩어리가 아닌 것만 해도 좋은 일 탈속의 심정으로 경과를 살필 밖에 해탈..

신작 詩 2024.06.11

신 하여가 2

신 하여가 2 / 김신타내가 죽는 일이 일어나는 것도진정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이며따라서 내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내가 죽는 걸 상상하기보다는사는 걸 상상하는 게 좋은 것처럼원치 않는 일보다는 내가원하는 걸 상상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내 안에 있는 내가 생각하기엔그 모든 게 좋은 일이지만,몸과 마음속 내가 생각하기엔더 오래 사는 게 좋으니까 말이다이 몸이 죽고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도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신작 詩 2024.04.26

거룩한 밤

거룩한 밤 / 김신타 거 그리고 룩 떼어놓고 봐도 거룩하다 아무런 의미 없지만 무언가 거룩한 느낌이 내 안에 담겨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든 게 거룩하다 모두가 신의 창조물이고 또한 신 자신이기도 하므로 생각으로는 그도 나도 신임을 알지만 내 생각과 다른 그를 때로는 미워하고 그가 잘못이라고 판단한다 판단을 없애야 한다고 말로는 떠들면서도 여전히 판단의 포로가 된다 내 판단이 옳다는 생각으로 언제나 되어야 내 판단이 옳은 만큼 그의 판단을 존중하게 될까 언제쯤 웃음 띤 얼굴로 내 생각을 말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이 옳은 만큼 그의 생각도 옳으며 그의 생각이 옳은 만큼 내 생각도 옳으므로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닌 빛과 어둠이 하나가 된 파란빛과 붉은빛이 합쳐진 밝은 빛으로 빛나는 나 그런 나를 꿈꾸어 본다..

신작 詩 2023.12.25

겨울나무

겨울나무 / 김신타 나뭇가지 사이로 전깃줄 지나가고 참새 몇 마리 앉았다 날아가는 가지만 쭉쭉 솟은 은행나무 가로수 타고 가던 자전거를 세우고 겨울에서 겨울을 보다 그 아래 관목 위 은행잎은 먼지처럼, 어쩌면 눈처럼 쌓여있고 나는 뒤따라 걸어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혹시나 택시 타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도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다 골목 안 카페 간판을 이미 지나친 것이다 잠시의 방황 끝에 도착한 낯익은 얼굴들 겨울을 감싸는 털모자와 장갑은 가방에 쑤셔 넣고 낯익은 쌍화차를 마신다 봄을 미리 가불하지 않으며 겨울 그대로 살아가고자 함이다 다만 약해지는 믿음에 반복의 힘을 주문 呪文할 뿐이다 "나는 당신 안에 살아있으며 내가 선언한 소원! 이미 이루어져 있음에 감사합니다."

신작 詩 2023.12.08

순종

순종 / 김신타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고요히 중심을 찾아 몸을 앉히면서도 마음으로는 흔들림을 받아들이는 것 받아들임이 곧 우리의 삶이겠지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기꺼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건 무소불위 당신의 힘에 의한 것이니 내 뜻대로 하면서도 당신의 힘에 따르는 것 순종이 곧 우리의 길이겠지 내 뜻대로 하면서도 당신의 드러냄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바로 순종이겠지 한 마리 양이 길을 벗어남도 탕자가 집을 떠남도 내가 죄를 범함도 모두가 불순종 아닌 당신이 준 선물 자유의지에 의한 일어남이자 순종과 자유의지 내 앞에 난 갈림길이 아니라 정상으로 가는 이정표일 뿐 정상 마침내 당신 품에 안길 수 있는 이정표 맞는 길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 때도 있는

신작 詩 2023.11.04

풍요

풍요 / 김신타 풍요가 있으므로 해서 가난이 있다 풍요가 없는 가난이란 있을 수 없다 바이블에 있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남과 비교하지 않는 마음을 뜻한다 다른 이와 비교하는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풍요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풍요는 전체이고 가난은 부분이니 부분이 아니라 전체와 하나가 되라 가난에서 풍요로 향하는 게 아니라 풍요에서 풍요를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늘 지금 풍요에 있다 현실이 풍요의 노정 路程이기 때문이다

신작 詩 2023.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