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詩

기억이라는 카메라

신타나몽해 2020. 10. 25. 23:20

기억이라는 카메라

신타


또 하루가 지나 새로운 아침입니다
마치 방송국 카메라의 촬영이 시작된 듯
오감으로의 영상은 물론이고
생각과 감정까지도 촬영되며
언제든 재생과 편집이 가능합니다
카메라와 카메라 감독이 합체된,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가장 최신형 인공지능(자연지능) 카메라입니다
카메라의 소프트웨어가
날마다 업데이트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드웨어도 날마다 업데이트되지만
수명은 대략 100년 안팎입니다
나의 이름은 「기억」이며
수많은 기능이 내장된 카메라입니다
지금 이 글도 내가 쓰고 읽고 있으니까요
나는 웃을 줄도 알고 울기도 합니다
기쁨 속에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밤이 되면 카메라 스위치를 스스로 끄고
잠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아침이면 새로운 우주에서 또다시 촬영을 시작합니다
다큐도 찍지만 픽션도 찍곤 합니다
또는 다큐를 픽션으로 편집하거나
픽션을 다규로 편집하기도 합니다
대개는 나도 모르게 내가 그리합니다

나는 나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아테네 카메라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일갈하기도 했습니다만
내가 나를 안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껏 안다는 게
다른 카메라와 비교한 기억일 뿐입니다
내 주변의 카메라보다 기능이 낫다거나
편집을 더 빠르게 더 잘한다거나
시험 외에는 그다지 쓸데없는 지식을
더 많이 외워 알고 있다거나
또는 다른 카메라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나임을 아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합니다
장좌불와, 단식, 무문관 수행하는
카메라도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의 의지박약을 자책하기도 하지만
혹독한 수행도 나태한 태도도 아닌
중도를 설하신 석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스스로 위안 삼기도 합니다

중도!
중도가 나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백척간두 진일보, 은산철벽이란 무엇일까?
도무지 깨달음이 없는 나의 의문
아무런 희망도 없는 절망의 벽에 서서
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뛰어내리면
날개가 돋고 날게 된다는 가르침을 믿고
절망의 벽 즉 절벽 위를 뛰어내릴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몇 번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봐도 눈물이 납니다
그때 정말 절벽 위에서 뛰어내렸다면
내 몸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고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 되고 말았겠지요
비유를 통한 가르침의 폐해입니다
비유라는 사실을 모르고
곧이곧대로 알아듣는 사람도 있음입니다

마음으로의 절벽
절망의 벽을 버려야만 합니다
절망의 벽에서 뛰어내려야 합니다
희망이라는 끈을 놓쳤을 때 우리는
이번엔 절망의 끈을 단단히 부여잡습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절망이라는 절벽에 올라선 지금이
뛰어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여기서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다시 붙잡으려 하지 마세요
희망도 절망도 모두 버리세요
절망조차 버렸을 때
우리가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음입니다
제발이지 절망을 부여잡은 채
타인으로부터 동정받으려 하지 마세요
아니면
덴마크 카메라 키엘케고르의 가르침처럼
죽음으로 도피하려고 궁리하지도 마세요
절망을 버리기만 하면
기쁨과 자유와 평안이 모두 내 것인데
왜 우리는 절망을 부둥켜 안은 채
죽음에 이르는 병을 그토록 사랑하는 걸까요?

절망을 버린다 함은
언제 절망에 빠졌었느냐는 듯
절망을 그냥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희망을 버릴 때도 우리는
무슨 희망을 가진 적 있었느냐는 듯
희망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절망조차 잊고 거듭날 때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입니다
자신의 신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은 없습니다
절망을 잊어버리는 게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일이며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길입니다
절망의 벽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어깨죽지에는 날개가 돋고
우리는 푸른 하늘을 날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유롭게
창공을 나는 카메라가 됩시다
우리는 이미 새보다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카메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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