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詩, 수필)

가상현실과 공의 세계

신타나초 2022. 2. 9. 09:27

가상현실과 공의 세계


우리는 '가상현실'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영어 약자로 'VR 체험'이라고 쓰인 간판을 볼 수 있죠. 제가 남원 광한루 부근에 있는 상가에서 체험해 본 '춘향가마 추격전'은, 화살이 제 얼굴 쪽으로 날아오고 제가 탄 가마가 도망가다가 길에서 굴러떨어질 듯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이러한 가상현실 (VR·virtual reality)이라는 거죠. 우리가 서 있는 땅덩어리인 지구를 비롯한 우주가 바로 가상현실입니다. 이러한 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의문이 하나 생길 것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몸뚱이 때문이죠. 가상현실인데 어찌하여 우리가 땅을 딛고 서 있을 수 있으며 여기저기 움직일 수 있느냐 하는 의문 말입니다.

여기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었듯 우리의 인식을 스스로 바꿔야 하는 것이죠. 다소 놀라울 수 있겠지만, 이 몸뚱이조차 가상현실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구를 비롯한 우주가 따로 있고 자신의 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각자의 몸이 바로 지구상에 있는 많은 물상 중의 하나입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자신의 신체로부터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 즉 다른 사람의 신체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의 물상으로 보면서도, 자신의 신체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물상으로 보지 못하는 게 지금까지 대부분 우리의 모습입니다. 흔히 말하는 내면과 외부 세계로 나누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몸을 외부 세계로 보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나 다른 사람의 몸이 외부 세계에 속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몸도 분명 외부 세계에 속합니다. 즉 우리 각자의 몸이 외부 세계인 우주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우주와 하나라는 거죠. 내 몸은 여기 있고 우주는 저기 있는 게 아니라, 내 몸과 우주 그리고 여기와 저기가 하나입니다.

따라서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 속 물상만이 아닌, 우리 저마다의 몸도 세상 속에 있는 물상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저마다의 몸이 외부 세계와 마찬가지로 가상현실입니다. 우리 자신의 몸이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불교에서 말하는 공 空에 대해서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의 가상현실이라는 용어 대신, 2,500년 전에는 공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을 뿐이니까요.


[ 공주사대부고 19회 졸업생,
2022년 문집 '가본 길' 상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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