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시간의 광야

신타나초 2022. 4. 8. 13:59


시간의 광야


우리는 흔히 시간을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는 선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 더욱이 현재는 장구한 과거와 안갯속 같은 미래 사이에 있는 아주 짧은 순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그랬다.

그러나 60대에 들어서면서 내게는 현재가 찰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현재라는 순간을 스치듯 지나가면 과거가 되는 게 아니라, 벌판처럼 펼쳐진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어느 한 지점의 기억을 과거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과거라고 부르는 현재와 미래라고 부르는 현재가 있을 뿐, 과거와 미래란 있을 수 없다.

지평선이 보이는 현재라는 광야에서, 저 멀리 기억나는 한 지점을 과거라고 여기지만, 그 모든 곳은 하나도 빠짐없이 현재일 뿐이다. 아무리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긴다고 해도, 그 모든 행동은 지금 여기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 즉 지금 여기에서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제는 무엇이고 또 내일은 무엇일까? 모든 날은 또 다른 오늘이며, 수많은 오늘이 끊임없이 쌓이고 있을 뿐이다. 마치 같은 크기의 종이가 쌓이는 것처럼, 어제라는 오늘 위에 오늘의 오늘이 쌓이고, 또 내일이라는 오늘이 그 위에 쌓이는 모습일 뿐이다. 구분하기 위하여 편의상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지 모든 날이 오늘이다.

생각을 바꾸어 오늘이라는 시간이 쌓여 있다기보다, 평면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A4용지에 담긴 오늘이라는 시간이 어느 하나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채, 우주 가득 펼쳐진 모습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즉 오늘 또는 현재라는 카드의 매스게임이라고나 할까. 수많은 카드가 수없이 변하지만 그 모든 게 바로, 우리의 오감과 상상과 기억 속에 있는 현재를 나타내고 있음이다.

어쩌면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하면서, 자신이 과거 또는 미래에 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제 다리 가려운데 남의 다리 긁는 격이다. 과거로도 갈 수 있고 미래로도 갈 수 있으나, 그 모든 것은 현재라는 시간의 광야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도 현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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