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감각과 기억의 세계 그리고 깨달음

신타나몽해 2022. 8. 18. 02:22

감각과 기억의 세계 그리고 깨달음


우리 인간에게는 인체의 오감에 의한 감각이 있으며, 그러한 감각에서 비롯된 감정과 생각 그리고 의지적 행동 등에 대한 기억 속에 우리는 매몰되어 있다. 매몰이라는 표현보다는 몰입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색수상행식 色受相行識의 수렁에 빠져있음이다.

더욱이 자신이 감각에서부터 감정과 생각, 행동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한 기억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채 살아간다.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감각에서 비롯된 감정·생각·행동과 이러한 색수상행에 대한 '인식된 기억'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레 몰입되는 감각적 세계와 감각 세계에서부터 시작되는 감정과 생각, 행동 그리고 인식과 기억이라는 세계에서 벗어남이다.

이게 바로 차원 상승이다. 그런데 차원 상승이라고 해서 시공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1차원인 선과 2차원인 면 그리고 3차원인 입체가 같은 시공간에 있지 아니한가. 차원 상승이란 어쩌면 코페르니쿠스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번데기가 나방이 되어 고치 밖으로 나오는 것이며, 병아리가 달걀 껍질을 깨고 부화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감각의 세계에서나 시공간이 있을 뿐, 감각 (또는 감각에 대한 기억)을 벗어난 세계에는 시공간이 없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침묵일 뿐이며, 텅 빈 침묵과 함께 무형의 자기 자신이 있을 따름이다. 이게 바로 깨어남이고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시공간이 있는 세계에서, 시공간이 없는 텅 빈 침묵으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색수상행식이라는 또는 시공간이라는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을까? 다름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할 때 가능하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희망뿐만 아니라 절망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깨달음에 대한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졌을 때, 그럴 때일수록 절망을 부둥켜안고 절대 놓지 않으려 한다.

절망을 삶의 마지막 보루처럼 여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끝까지 절망을 포기하지 못한 채, 일찍이 철학자 키엘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고 만다. 깨달음에 대한 희망은 어쩔 수 없이 놓으면서도, 절망은 끝까지 놓지 못하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어리석게도.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마지막으로 절망조차 놓아버린 경우이다. 대표적으로 붓다가 그렇다. 궁궐에서 아버지인 왕과 아들을 안은 아내의 간청을 뿌리치고 사문이 되고자 했을 때, 그가 얼마나 고심했을까를 상상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렇게 고심 끝에 밤중에 몰래 출가한 그가, 6년이라는 세월 동안 명상과 고행을 통한 수행을 했음에도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때 그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지를 상상해보라.

심신이 모두 피폐해진 그는 결국 길바닥에 쓰러졌으며, 우연찮게 지나가던 사람의 눈에 띄어 우유죽을 얻어먹고는 다시 살아났다. 이때 그의 행동이 남달랐다. 그는 더 이상 절망에 매달리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희망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큰 나무 아래 앉아, 다만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소망했을 뿐이다.

깨달음에 대한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졌을 때 절망조차 포기하는 것! 그게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 중의 하나이다. 즉 희망에 매달리지도 않고 절망에 매달리지도 않음이다. 그러니 깨닫고자 한다면 먼저 추구 즉 애씀이 있어야 한다. 깨닫고자 애쓴 끝에 절망하게 되는 것이지, 애씀 즉 추구도 없는데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질 수는 없는 일일 테니 말이다.

죽음의 근처에까지 가는 추구에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때 우리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결국 희망을 포기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절망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처럼 절망도 포기하면 되는데 이게 결코 쉽지 않다. 절망을 놓아버리는 게 죽음보다 더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망을 놓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깨달음이라는 구도의 길뿐만 아니라, 돈이라는 생존의 길 또는 사랑이나 명예라는 관계의 길에서도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경우가 있지만, 구도의 길에서는 절망적인 두려움을 내려놓아야만 깨달음이라는 텅 빈 침묵을 맞이할 수 있다. 추구와 절망 그리고 절망조차 내려놓음이라는 세 가지가 삼위일체로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깨달음이라는 설산의 정상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는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 내려올 때 보면서, 천천히 조심스레 다시 하산의 길이 시작된다. 정상이 끝이 아니다. 자신이 우주 안에 담긴 티끌보다 작은 유형의 몸이 아닌, 유형·무형의 우주를 담고 있는 무형의 영적 존재임을 깨달은 상태에서 기존의 고정관념을 하나씩하나씩 바꾸어나가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새로 태어나,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관념을 스스로 바꾸어나가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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