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에 대하여
나라는 게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무아를 깨닫고자 한다면 말이다.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 우리가 흔히 간과하게 되는,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
자신이 그동안 의지해왔던 기존의 관념에 계속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우리가 관념의 주인인 것이지, 관념이 우리의 주인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발이지 마음의 하인이 아닌 마음의 주인이 될 일이다.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기존의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우리 마음이 열려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다. 옳고 그름을 자신의 이성 또는 지성으로 성급하게 판단하려 들지 말라.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의문을, 마치 화두처럼 오래 간직하다 보면 어느 땐가 내면에서 답이 주어진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바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저마다의 내면에 신('참나'라고 해도 좋다)이 있으며, 아울러 내면에 있는 신 또는 참나가 답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믿음의 힘이란,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깨달음이란 외부에서 얻는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영감으로 느껴지는 내면적인 앎이기 때문이다.
관념의 주인! 마음의 주인! 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이 모든 건 '개인적인 나'라는 게 없다는 무아를 깨달았을 때 가능한 일이다. 개인적인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언제나 관념의 노예이거나 마음의 하인으로 지낼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자기 내면에 있는 관념 또는 마음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라는 게 없다면 즉 무아라면, 무엇이 남아 깨닫느냐는 의문은 이제 거둬들이라. 개인적으로 분리된 내가 없을 뿐이지, 하나이자 절대인 전체 안에 있는 부분으로서의 나라는 건, 이 또한 하나이자 절대이며 결코 죽어 사라질 수 없는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내가 단멸하고 무상한 존재인 것이지,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나는 영원하고 항상한 존재일 뿐이다. 전체 안에서 나란, 없어질 수도 사라질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나라는 건 없다는 무아를 깨달아, 많은 두려움이 사라지는 자유로움을 느껴볼 일이다. 내 안의 나 즉 신 또는 참나와 언제나 함께하는 충만함을 느껴볼 일이다. 자기과시와 자기도취에 빠지기 쉬운 에고적인 내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이를 이롭게 하는 홍익 이념을 실천하는 초자아적인 내가 되고자 함이다. 무아를 깨닫고자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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