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詩, 수필) 88

헤어짐의 미학

헤어짐의 미학 / 김신타 그대 삶에 평안함이 이어지길, 파도가 칠지라도 지나서 보면 우리에겐 늘 잔잔한 바다 그동안 고마웠어 너를 사랑해 파도였다가도 다시 바다일 수밖에 없는 운명 떨어졌을 때 잠시 만났지만 어차피 하나일 수밖에 없는 너와 나 지금은 둘이지만 언젠가 다시 하나가 될 터 그때 괜히 미안해하지 말고 지금 헤어짐조차 사랑하자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에 감사하자 너와 나 그리고 모두에게 깊이 고개 숙이자 만남이 없었다면 우리 헤어짐조차 아름답다고 독백하는 시간 고요히 가질 수나 있을까 바다가 있기에 파도가 있고 파도가 있기에 바다인 것처럼 우린 모두 하나이지만 둘로 보이는 때가 있을 뿐 다시 하나임이 느껴지는 날 언제일지라도 그때는 오리니 사랑과 아쉬움으로 그럼 그대여 안녕 떠나갈 때 떠나간대도 ..

찻물을 끓이며

찻물을 끓이며 / 신타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싶어 찻물을 올려놓는다 평생 아침잠 많던 내가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런 호사를 누린다 도라지. 생강. 마늘이 차로 합체된 조그맣고 하얀 망사주머니 끓인 물을 붓는다 목과 기관지에 좋으리라는 기대를 마신다 따뜻함이 좋다 지금이라는 순간이 좋다 한때는 내가 산다는 게 살아 있음이 고통인 때 있었지만 지금은, 지금이어서 좋다 내가 살아 있음에 아침과 마주할 수 있음에 하고자 하는 일 행할 수 있음에 내가 나를 볼 수 있음에 내가 존재함에 [2020년 구례문학 제 29호 상재]

꿈의 세계

꿈의 세계 현실 세계는 절대계 속의 상대계인 반면, 꿈의 세계는 상대계 속의 절대계이다. 그러므로 꿈꾸면서 우리는, 절대계의 존재 형식과 우리 자신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면, 불교 경전이나 '신과 나눈 이야기' 라는 영성 관련 책에 나오는 것처럼, 현실 세계가 환상임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이든 악몽이든 우리가 꿈을 꾸고 깨어났을 때, 꿈속에 있었던 자기 자신은 물론이며 다른 사람도 건물도 시간도 공간도 모두 사라진다. 유일하게 남는 것이라곤 기억뿐이다. 그리고 꿈속에 내가 없는 경우란 없다. 모든 꿈속에 '나'라는 존재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처럼 꿈속의 절대계든 현실 속의 상대계든 '나'라는 존재가 없을 수는 없다. 다만 ..

여전히 천동설

여전히 천동설 태양이 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학교에서 배운 과학 지식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기억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감각만이 진실을 담보한다는 어리석은 믿음은 여전하다. 오늘날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과학이라는 이름에 의해 세뇌된 모습일 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전히 천동설을 믿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태양이 도는 것으로 보인다면, 시각이라는 감각이 잘못된 것임을 이제는 깨달아야 함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오감으로 확인한 사항만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지구의 자전 속도야 위도에 따라 달라지므로 차치하고라도, 공전 속도가 대략 초속 30km라고 하므로 이를 시속으로 바꾸면 10만km가 넘는다. 이러한 속도로 하루도 쉬지 않고 태양 주위를 달리는 지구 위에서, 자신..

요람과 무덤 사이

요람과 무덤 사이 / 신타 "요람과 무덤 사이에는 고통이 있었다"*가 아니라 다만 기억이 있었을 뿐이다 고통의 기억일 수는 있겠지만 밀물처럼 다가왔다 썰물처럼 사라지는 고통 남는 것은 고통의 파도가 아니라 파도가 가라앉은 기억의 바다일 뿐이다 만약에 기억이 없다면 그까짓 고통이 무슨 대수랴 주삿바늘 들어갈 때의 따끔함과 다를 게 무엇이랴 살면서 기억나는 게 고통뿐인 사람은 불안한 밤이며 기쁨인 사람이라면 그는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이다 지난 뒤에 돌아보면 고통도 사랑이 되며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처럼 기쁨으로 물드는 황혼이 되자 깊게 익어가는 노을빛이 되고 웃음으로 빛나는 저녁이 되며 평안을 담아내는 어둠이 되어 아름다움을 꿈꾸는 밤이 되자 * 독일의 작가이자 시인 '에리히 케스트너'의 시 「숙명」 인..

낮달

낮달 / 신타 아쉽고 따뜻한 배웅 받으며 나선 기차역 가는 길에 있는 공원 아침 해는 동녘 하늘 붉은데 정월 대보름 며칠 지나지 않아서인지 보기 드물게 커다란 낮달이 하얗다 낮달은 그녀 마음이며 아침 해는 내 마음인 듯 뜨거운 아쉬움은 눈가에서 촉촉해지고 체한 것처럼 가슴 먹먹하다 내려놓는다는 건 마음이 아니라 기억이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건 기분이거나 느낌이 아니라 이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순간이며 우리는 기억에 계속 붙잡혀 있을 뿐이다 내려놓지 못하는 기억에 사로잡혀 있음이다 낮달을 본 기억 체한 것 같은 먹먹함 기차를 스치는 바람처럼 모두 내려놓으리라 다시 불어오리니 [ 공주사대부고 19회 졸업생, 2022년 문집 '가본 길' 상재 ]

가상현실과 공의 세계

가상현실과 공의 세계 우리는 '가상현실'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영어 약자로 'VR 체험'이라고 쓰인 간판을 볼 수 있죠. 제가 남원 광한루 부근에 있는 상가에서 체험해 본 '춘향가마 추격전'은, 화살이 제 얼굴 쪽으로 날아오고 제가 탄 가마가 도망가다가 길에서 굴러떨어질 듯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이러한 가상현실 (VR·virtual reality)이라는 거죠. 우리가 서 있는 땅덩어리인 지구를 비롯한 우주가 바로 가상현실입니다. 이러한 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의문이 하나 생길 것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몸뚱이 때문이죠. 가상현실인데 어찌하여 우리가 땅을 딛고 서 있을 수 있으며 여기저기 움직일 수 있느냐 하는 의문 말입..

새해 첫날

새해 첫날 그러고 보니 오늘이 새해 첫날이네요. 어제가 12월 31일이었고 지금 시간이 새벽 3시가 넘었으니 말입니다. 언젠가는 일출을 본다고 꼭두새벽에 바닷가 일출 명소를 찾아간 적도 두어 번 됩니다만, 지금은 잠자리에 누워서 스마트폰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합니다. 일출 보러 간다고 전날 저녁부터 또는 새벽부터 부산을 피웠던 것도 부질없는 짓이 아니라, 지금 느끼는 충만감의 바탕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굳이 불교의 연기법을 떠올리지 않아도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에서는 원인 없는 결과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무러나 새해 첫날임에도 어디로 떠나고픈 충동이 일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다는 건 편안한 일입니다. 하긴 1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