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79

나만이

나만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느 철학 교수가 오래전 신문에 기고한 칼럼 제목이 '나만이 나만이' 였다. 인간 사회의 많은 문제와 사건이 '나만이' 즉 자기 자신만을 위하고자 하는 생각 때문에 일어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다시 '나만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 있다. 이 세상에는 나만이 즉 자기 자신만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현재 약 77억 명의 인류가 있지만, 각자가 자기 자신만이 혼자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얘기다. 77억 명이나 살고 있는데 각자 자신만이 혼자 지구상에 산다는 얘기는 또 무엇일까? 외부 세계의 현실적인 모습은 77억 명일지라도 내면적으로는 각자가 혼자 존재하고 있음이다. 이는 불교 경전인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인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

쎔쎔 (또는 쌤쌤)

쎔쎔 (또는 쌤쌤) 결국 "서로 같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영어 same same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이 '쎔쎔'이라는 단어가 요즈음 나에게 정신적인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감사한 일도 더러 생각나지만, 그보다는 불편했던 일, 괘씸한 일 등이 머릿속에 더 자주 떠오른다. 그때마다 상대방의 모습이 연이어 떠오르며, 그에 대한 기분 나빴던 생각 또는 괘씸한 마음이 더 깊어지곤 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일 뿐이다. 해서 나는 60 중반이 넘은 나이가 되어 이제서야 마음속으로 쎔쎔을 외치게 되었다. 그가 내게 잘못한 일이 있다면 다른 때에는 그가 내게 잘한 일도 있을 것이니 쎔쎔이며, 또는 그만이 내게 잘못한 경우가 있는 게 아니라, 나도 그에게 잘못한 일..

무서움이 바로 신이다

무서움이 바로 신이다 화장실에서 깜깜한 창고 쪽으로 난 쪽창에 설치된 방충망. 방충망에 생겨난 구멍을 메꾸기 위해 붙여둔 노란 색 박스 테이프.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아니면 세면대 앞에서 양치질할 때마다 눈에 띈다. 옆눈으로 보이는 노란 색이 신경 쓰인다. 무서운 마음일 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한 생각! 내 마음에 들어선 무서움조차 그게 바로 신 神이라는 생각이다. 무서움이 곧 신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 마음에 들어있던 무서움이 사라졌다. 신은 내가 어렸을 적이나 지난날의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친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이 바로 내 근원이자 나 자신이고 내 엄마와 아빠라면 무서울 게 무엇인가?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창고에 드리운 캄캄한 어둠조차, 이 모든 게 사랑 자체..

불살생 不殺生

불살생 不殺生 살생이 살생이 아니다. 다시 말해 불살생이란 살생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살생이 살생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릇 생명이란 동물에만 있는 게 아니라 식물에도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이를 동물로만 한정하여 살생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만들어놓는 게 보통의 종교 계율이다. 어떤 종교에서는 다른 요일에는 상관없지만, 특정한 요일에 특정한 동물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계명도 있었다. 지금이라면 같은 종교를 믿는 후배 종교인들도 선배 종교인들의 이와 같은 금기에 대하여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현재도 명상할 때나 일상생활에서, 달려드는 모기를 일부러 잡지 않고 참으며 수행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종교적 수행 방법도 있다. 그러나 모기를 애써 잡지 않으며 수행하는 그들 종교의 교주가, 돼지고..

감사하는 내맡김

감사하는 내맡김 포기하고 내맡긴다는 게 "나는 모르겠습니다. 알아서 해주십시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요?"라는 식으로 신에게 간구하거나 또는 원망하는 게 아니라, 포기하고 내맡기는 상태에서 다만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일어난 것과 관계되는 사람들 등등 마음에 떠오르는 대상을 모두 받아들이며, 신에게 감사 기도를 하거나 또는 명상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내맡김입니다. 원망하면서 내맡기는 게 아니라, 감사하면서 내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포기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애써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마치 물이 되어,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나는 신 안에서 모든 일을 할 ..

고통과 행복

고통과 행복 우리는 행복 또는 고통만을 겪어보기 위하여 이 세상에 몸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고통이 없는 행복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하는 행복을 누리고자 이 세상에 몸으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따라서 행복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고통을 거부하거나 애써 피하고자 할 게 아니다. 고로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닐까 싶다. 고통을 멀리하고 피하면서 행복만을 추구하는 게 아닌, 고통과 행복을 모두 수용하는 자세가 바람직한 삶의 자세일 것이다.

주관과 객관의 세계

주관과 객관의 세계 다수가 믿어마지 않는 객관의 세계에서 살든 무소의 뿔처럼 홀로 걸어가는 주관의 세계를 살든지는 저마다의 선택이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게 아닌 한 쪽을 기준으로 삼되 다른 쪽을 수용하는 것이다 기준이 어느 쪽이냐가 삶의 방향타가 될 것이다 보리수나무 아래 문득 보이는 샛별 아래 내가 있느냐 내 안에 샛별이 있느냐 객관 속에 주관이 있느냐 주관 속에 객관이 있느냐의 문제다 내 몸이 곧 외부세계에 포함된 하나의 대상임을 자각했을 때 나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은 시공조차 없는 텅 빈 침묵 나는 보이지 않는 무 無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텅 빈 빛 무아無我이면서 분명 존재하는 몸과 마음과 영혼의 삼위일체 객관으로 땅을 딛고 주관으로 하늘을 바라볼 일이다 객관 속에 ..

평면과 입체

평면과 입체 보이는 시각을 비롯한 오감으로 느껴지는 모든 게 바로 절대계 안에서 일어나는 상대적인 모습이다. 상(像)이 우리 두뇌 안에서 맺히는 게 아니라, 바로 물상(物像) 위에 맺히고 외부 세계가 곧 내면세계이며, 상대계 또한 절대계 안에 있는 세계일 따름이다. 우리가 관념적으로 분리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아무리 깊이 파보아도, 우리 눈에 보이는 감각으로는 언제나 평면일 뿐이다. 시각의 대상들은 오직 평면으로 보이며 입체는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똑같은 사물이라 해도 눈엔 평면으로 보이고 뇌에선 입체로 인식된다. 오감의 감각과 더불어, 반복된 경험과 추론이 입체적 허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느 게 옳거나 옳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감각과 인식이라는 게 그러할 뿐이다...

지상에 온 이유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이나 시험조차도 신의 사랑임을 깨달아야 한다. 신의 사랑이 아닌 게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고통의 바다라고 하는 우리의 삶조차도 신의 사랑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무엇 하러 우리에게 세상 체험을 하도록 했겠는가? 우리 자신이 원하고 또한 신이 원해서 이루어진 일일 뿐이다. 천상에서 천사였던 우리 인간이, 고해라고 불리는 이 지상으로 내려온 이유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