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와 실존
실재와 실존
실재라는 말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뜻하며,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즉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허상 또는 환상이라는 말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몸을 비롯한 모든 물질적인 대상이 허상이라거나 환상이라는 말은, 그것들이 지금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무슨 홀로그램이나 그림자 또는 꿈 같은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지 않으므로 궁극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허상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육신을 비롯한 모든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대상은 언젠가는 사라지는, 즉 영원한 존재가 아니므로 실재하지 않는 허상 또는 환상이라고 하는 것일 뿐, 그것이 지금 실존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공 空을 깨쳤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원히 실재하지 않으므로 결국 허상 또는 환상이라는 주장이 아니라, 여기서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 당장 자신의 육신을 비롯한 모든 유형의 대상이, 금강경에 나오는 대로 꿈 같은 환영이고 물거품이며 그림자나 이슬 또는 번갯불과 같다고 주장한다. (일체유위법 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 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 如露亦如電)
그러나 아니다. 그것들은 영원히 실재하지 않는 것일 뿐, 일정 기간 동안에는 분명히 실존한다. 궁극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 당장의 실존마저 부정하는 어리석음은 버려야 한다. 항상 恒常 하지 않고 무상 無常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지, 자기 몸을 비롯한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지금 당장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불교가 전래한 이래 지금까지 이러한 잘못된 해석이 계속 전승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우리가 흔히 현실이라고 하는 인간의 삶이, 한 편의 드라마일 뿐이고 우리는 모두 드라마에 출연하여 열연하는 배우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드라마 내용과 배우가 맡은 저마다의 역할이 가짜일 뿐, 드라마 세트장과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 자신이 가짜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소설책의 내용이 픽션이지, 소설책이 픽션인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함에도 지금까지 이른바 깨달았다고 하는 분들 대부분이,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이 모두 가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색은 가짜이고 공이 진짜라는 조사나 선사의 말씀과는 달리, 색과 공으로 나누어진 세계는 가짜이고 색과 공이 하나로 융합된 세계가 진짜라는 게 내 견해이다.
색이 일상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을 뜻하는 것이라면, 색즉시공 色卽是空 즉 '색 = 공' 이라는 등식이 아니라, 색과 공은 정반합 원리에서의 정 正과 반 反에 해당하는 '색 ≠ 공' 이라는 부등식이어야 할 것이다.
고로 색즉시공이 되려면, 색이라는 게 일상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상(이미지)을 뜻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내면에서 색즉시공인 것이지, 외부 현실에서의 모든 물상과 내면에서의 공이 같다는 의미에서의 색즉시공일 수는 없다.
위에서 언급한 색즉시공을 좀 더 부연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색즉시공에서의 색은 우리가 보통 눈으로 보는 현실 세계가 아니라, 저마다 자신의 내면세계 또는 흔히 말하는 마음속에 있는 세계를 뜻한다. 즉 내면세계 또는 마음속 세계에서의 기억된 상(이미지)이 바로 색 色이고, 텅 빈 내면세계 또는 마음속 세계 자체는 공 空 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생겨난 것 또한 텅 비었다는 뜻인) 제법공상 諸法空相 다음에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문제는 제법공상에서 제법이 무슨 뜻이냐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제법을 현실 세계에 있는 모든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대상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여기서 제법은 현실 세계에 있는 물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또는 내면, 의식) 안에 있는 상(이미지)을 뜻한다. 우리의 내면 즉 마음 안에 있기에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인 것이지, 현실 세계에 있는 어떠한 것도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하지는 않지 않은가?
이치가 이러함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제법 諸法'을 마음 안에 있는 기억된 상이 아닌, 밖에 있는 물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반야심경에 대한 이해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이른바 깨우쳤다고 하는 선지식의 해석 또한 그러하니 더욱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해석을 달리 할 수 있는 때가 왔다. 기존의 해석대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붙잡고 있을지, 아니면 새로운 해석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부디 새로운 해석과 더불어 깨달음의 기쁨이 함께하는 시간이 되시길… / 김신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