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하는 영원한 존재
신과 함께하는 영원한 존재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된다는 것! 이러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러한 생각을 나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전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혼자서 화를 내고 도리질 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칠십이 가까워진 나이. 산전수전 공중전에 내전까지 겪어본 나에게 있어, 이러한 생각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생각이 문득 떠오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 생각에 이어 캠핑카 타고 바다낚시를 가고 싶은, 내 버킷리스트가 실현이 안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내가 없어도 되는 마당에 버킷리스트가 무슨 대수랴. ㅎ
물론 이러한 내 생각의 바탕에는
"모든 존재는 영원하다."
"몸이 아닌 무형의 존재인 우리 인간에게 죽음이란 없다."라는
믿음을 넘어선 앎이 깔려있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누구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있다. 우리와 늘 함께하는 몸이 내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점차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이루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소망을 버리고자 한다. 물론 살다 보면 무언가 바라는 바인 소망이 생길 수 있는데, 그러한 바람이나 소망을 무시한 채 속세를 벗어난 도인처럼 살자는 얘기는 아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에 매달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문득 떠오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라, 무심하게 내려놓고 다만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음이다.
(위 내용에 설명을 덧붙이자면 다음과 같다. 견성이란 깨달음의 시작점이고 해탈이란 깨달음의 상태에서 내려놓음과 내맡김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를 말한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가 바로 견성이며,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게 되었을 때 즉 아상 我相에서 벗어난 다음, 그러한 자신을 신에게 완전히 내맡기는 게 바로 해탈이다. 한마디로 해탈이란 우리가 저마다 신과 늘 함께함을 깨달아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앞에서 나는 산전수전 공중전을 거쳤다고 했는데, 엊그제 갑장인 어느 분이 살아온 얘기를 듣고 나서는, 그에 비하여 내 삶이란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2살 나이의 그가 당시 공수부대(지금의 특수전 부대)에 자원하여 들어갔을 때 일어난 일이다. 헬기에서 강하 훈련 중 강풍이 몰아쳐 낙하산이 착륙지점을 한참 벗어난 큰 나무 위에 걸렸는데, 낙하산과 함께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사흘을 버텼다고 한다. 강풍에 흔들리며 거꾸로 매달려 피가 얼굴로 쏠리는 와중에도, 이틀 간은 그래도 정신이 있었는데 삼 일째는 의식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던 중 마침 부근을 지나던 심마니에 의해 발견되었고 헬기로 후송되어 목숨을 건졌단다.
누구나 다 그런 적이 있었겠지만 30대 중반쯤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하려고 한 적 있었던 나는, 그의 삶의 여정 앞에서는 한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다만 나는 이후로 내전을 오랫동안 겪었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는 흔히 듣게 되는 말이지만, 내전은 좀 생소한 단어일 수도 있겠다. 내 안에 있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의 갈등. 달리 표현한다면 현실에 충실하자는 나와, 내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싶은 나 사이의 갈등이었다.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지가 내 오랜 화두였다. 어떻게가 아닌 왜?
내면에서 이런 의문을 품다 보니, 직장 생활에서도 무언가 뒤처지는 느낌을 스스로 받았다. 이후 17년 간의 공무원 생활을 스스로 접게 되었으며, 여차저차 30년의 세월이 더 흘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부터 6년 전인 2019년엔, 깨달음이라는 고속도로의 입구(톨게이트)라고 할 수 있는 견성 체험도 있었으며, 이후로 지금까지 외부 현실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으나, 내면에서는 무언가 진화가 계속되고 있음을 스스로 느낀다. 이 세상에 내가 없어도 된다는 생각 자체가 진화의 한 과정일 수 있음이다.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된다."는 생각을 누가 할 것인가? 나 자신을 돌아보면 답은 자명하다. 아무도 없다.
따라서 그러한 생각이 문득 들었으며 또한, 그러한 생각이 내 안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커다란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나는 내 깨달음이 진화했음을 자랑하고픈 게 아니라, 이러한 얘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을 뿐이다. 이해되는 분들은 이해되는 대로, 이해되지 않는 분들은 이해되지 않는 대로 말이다. 우리가 비록 육체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영성적으로는 모두가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 신과 함께하는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 김신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