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토지'의 작가. '토지'가 없는 한국 문학사를 상상해 보면,
박경리란 인물이 우리 문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박경리의 어린 시절은 각박했다. 열네 살에 네 살 연상의 여자와 결혼해,
열여덟에 박경리를 낳은 아버지는 박경리가 태어나자마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그런 아버지를 박경리가 좋아했을 리 없고, 어머니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진주여고에 다닐 때는 학비를 보내주기로 했던 아버지가 학비 부담을 어머니에게 미루자,
아버지를 찾아가 따지다 맞은 일도 있다.
여자가 공불하면 뭣하나 시집가면 그만이지 하는 말에, 당신이 공부시켰어요? 라고 서슴없이
당신이라 부르며 대들자,
아버지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박경리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문학은 그 시절 박경리에게 유일한 즐거움이자 희망이었다. 책을 미칠 정도로 좋아해
누가 책방에 돌려주는 책이 있으면 싹싹 빌어서라도 책을 손에 넣고선 밤새 읽고 돌려주곤 했다.
하루 밤새 책 세 권을 읽고 새벽녘에 새빨개진 눈을 껌뻑거리던 기억도 생생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인천 전매국에 근무하던 남편과 만나 결혼해 어두웠던 가정사의 그늘에서
벗어나는가 했으나
그 남편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투옥되고, 6.25 때 월북하면서 다시 홀로 되고 말았다.
평화신문과 서울신문의 문화부 기자를 거치며 기자가 부족해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던 그는 일 년 뒤 힘들다는 이유로 신문사를 그만두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69년 토지를 집필하면서 그는 일 년간 세상과 철저히 담을 쌓고 살았다.
원래 '토지'는 지금처럼 방대한 분량의 대하소설로 계획되었던 것이 아니다.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얘기를 토대로 한 권 분량으로 써서 탈고까지 마친 후에야 세상에
공개하기로 작정했던 작품이었다.
독하게 마음먹고서 전화도 끊고 신문도 끊고 원고청탁도 일체 받지 않은 채 원고지를
채워나가던 그는,
그러나 어머니와 딸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서 가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했다.
한 차례의 절필을 포함한 우여곡절 끝에 1994년에야 끝난 이 대장정은 원주시 단구동
옛 집에서 완성되었다.
1997년 이 지역이 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토지'의 산실이 헐릴 위기에 처하자 문화계 및
지역인사들이 나서고 토지개발공사가 협조하여 3천 평짜리 토지문학공원으로 영구 보존되었다.
- '진해정보' 에 실린 기사 중 '책 이야기' 에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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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집어든 정보지를 넘기던 나는,
'책이야기 - 토지' 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박경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막연히 알고 있던 박경리.
유명한 작가가 된 그의 재능이 부럽기만 했었는데
그 기사를 보면서 나는 눈물을 쏟으며 걸었다.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볼까봐
신문지를 높이 들어 읽으면서........
2005년 1월 자란 김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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