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결과에도 감사할 수 있는 힘
나와 함께하는 몸도 나의 몸이 아니라 신의 몸이며, 심지어 나의 의식조차도 신의 의식일 뿐이다. 고로 이 세상에는 내가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신만이 있다. 따라서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생각하는 활동이, 나의 의식이 아니라 신의 의식에 의한 것이다. 예전과는 달리 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젠 허무나 불안이 아니라 평안으로 다가온다. 몸이 무형의 나와 함께하는 것처럼, 무형의 내가 신과 함께함이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 자신을 스스로 유형(몸)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나는 유형이 아니라 무형이다. 몸과 같은 유형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감각되지 않는 무형으로 존재하고 있음이다. 이러한 앎이 깊어지면 내가 유형의 몸이 아니라, 무형의 존재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안을 가져다준다. 몸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생동안 몸과 함께하지만, 몸과 나는 서로 다른 존재이다. 우리가 옷을 입거나 자동차를 타지만, 옷 또는 자동차가 내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내가 있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만이 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쉽게 체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생각이 반복되다 보면, 생각이 느낌으로 다가오는 때가 있게 되리라. 생각으로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라, 몸으로의 느낌이 되어 비교적 오랫동안 머물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없다는 사실이 자유함으로 다가오는 때가 올 것이다. 나아가 신만이 존재하며, 나란 신의 부분이라는 사실이 축복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을 수 있음이다.
나라는 것이 몸처럼 지각되지는 않을지라도 존재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듯이, 신 역시 감각으로 지각되지는 않을지라도 분명히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의식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고로 자신의 의식 안에 있는 것만이 전부인 줄 아는 닫힌 사람이 되지는 말자. 자신의 의식에서 벗어나,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줄 아는 열린 사람이 되자. 그리고 '알 수 없는 존재'를 신 神이라 이름하며, 또한 '무엇인가'를 우리는 영감 靈感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언어는 신의 의식으로 창조된 것이며, 모든 영감은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상에 있는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막론하고 말이다. 내가 없으며 오직 신만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평안케 하리라. 어깨에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리라.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결과를 신의 덕분으로,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 역시 신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말이다. 모든 것을 내가 아닌 신이 행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신에 대한 추앙과 감사만이 아니라, 신에 대한 비난과 원망도 지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난과 원망했던 일들이 세월이 흘러서는 새옹지마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은 원망스럽고 거부하고 싶은 결과일지라도, 어쩌거나 이를 받아들이다 보면 감사한 일이 될 수도 있음이다. 신만이 존재하는데 신이 자신에게 해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기독교 마태복음에 나오는 구절이 바로 이것이다.
신에게 감사할 수도 있고 원망할 수도 있지만, 새옹지마와 같은 일을 자주 겪다 보면 자신이 원치 않는 결과에도 감사하면서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모든 일이 신의 사랑에서 일어나는 감사한 일이라는 깨달음이 깊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이 깊어질 때 우리에게는 감사한 일이 더욱 끌려오게 된다. 이게 바로 끌어당김의 법칙 즉 시크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