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詩, 수필) 93

요람과 무덤 사이

요람과 무덤 사이 / 김신타"요람과 무덤 사이에는고통이 있었다"*가 아니라다만 기억이 있었을 뿐이다고통의 기억일 수는 있겠지만밀물처럼 다가왔다썰물처럼 사라지는 고통 남는 것은 고통의 파도가 아니라파도가 가라앉은 기억의 바다일 뿐이다만약에 기억이 없다면그까짓 고통이 무슨 대수랴주삿바늘 들어갈 때의따끔함과 다를 게 무엇이랴살면서 기억나는 게고통뿐인 사람은 불안한 밤이며기쁨인 사람이라면그는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이다지난 뒤에 돌아보면고통도 사랑이 되며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처럼기쁨으로 물드는 황혼이 되자깊게 익어가는 노을빛이 되고웃음으로 빛나는 저녁이 되며평안을 담아내는 어둠이 되어아름다움을 꿈꾸는 밤이 되자* 독일의 작가이자 시인 '에리히 케스트너'의 시 「숙명」 전문 인용[ 공주사대부고 19회 졸업생 문집..

낮달

낮달 / 김신타 아쉽고 따뜻한 배웅 받으며 나선 기차역 가는 길에 있는 공원 아침 해는 동녘 하늘 붉은데 정월 대보름 며칠 지나지 않아서인지 보기 드물게 커다란 낮달이 하얗다 낮달은 그녀 마음이며 아침 해는 내 마음인 듯 뜨거운 아쉬움은 눈가에서 촉촉해지고 체한 것처럼 가슴 먹먹하다 내려놓는다는 건 마음이 아니라 기억이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건 기분이거나 느낌이 아니라 이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순간이며 우리는 기억에 계속 붙잡혀 있을 뿐이다 내려놓지 못하는 기억에 사로잡혀 있음이다 낮달을 본 기억 체한 것 같은 먹먹함 기차를 스치는 바람처럼 모두 내려놓으리라 다시 불어오리니 [ 공주사대부고 19회 졸업생 문집 '가본 길'(2022년) 발표 ]

가상현실과 공의 세계

가상현실과 공의 세계 우리는 '가상현실'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영어 약자로 'VR 체험'이라고 쓰인 간판을 볼 수 있죠. 제가 남원 광한루 부근에 있는 상가에서 체험해 본 '춘향가마 추격전'은, 화살이 제 얼굴 쪽으로 날아오고 제가 탄 가마가 도망가다가 길에서 굴러떨어질 듯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이러한 가상현실 (VR·virtual reality)이라는 거죠. 우리가 서 있는 땅덩어리인 지구를 비롯한 우주가 바로 가상현실입니다. 이러한 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의문이 하나 생길 것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몸뚱이 때문이죠. 가상현실인데 어찌하여 우리가 땅을 딛고 서 있을 수 있으며 여기저기 움직일 수 있느냐 하는 의문 말입..

새해 첫날

새해 첫날 그러고 보니 오늘이 새해 첫날이네요. 어제가 12월 31일이었고 지금 시간이 새벽 3시가 넘었으니 말입니다. 언젠가는 일출을 본다고 꼭두새벽에 바닷가 일출 명소를 찾아간 적도 두어 번 됩니다만, 지금은 잠자리에 누워서 스마트폰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합니다. 일출 보러 간다고 전날 저녁부터 또는 새벽부터 부산을 피웠던 것도 부질없는 짓이 아니라, 지금 느끼는 충만감의 바탕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굳이 불교의 연기법을 떠올리지 않아도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에서는 원인 없는 결과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무러나 새해 첫날임에도 어디로 떠나고픈 충동이 일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다는 건 편안한 일입니다. 하긴 1주..

달래모란

달래모란 / 김신타굳이 가시겠다면진달래꽃 아름 따다 뿌리지는 못할지라도당신의 치맛자락 붙잡진 않으리오그렇다 해도 당신 없는 계절은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일 뿐나는 당신만을 바라보는기꺼운 해바라기 되려 하오굳이 가시겠다면고이 보내 드리오리다약산 진달래꽃 아닐지라도앞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당신이 가고 나면나는 봄을 여읜 슬픔에삼백예순 날 하냥 눈물지을 터모란이 피기까지 나는당신과 함께 찬란한 봄이리다**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부분 인용[구례문학 제 30호(2021년) 상재][춘향문학 제 4집(2021년) 상재]

구월의 매미 소리

구월의 매미 소리 / 김신타 가로수 끝에 매달린 추억 간직하고 싶어 펄쩍 뛰어오르는 미니스커트 차림의 아가씨 연인과 함께 토요일 오후를 걷는다 도시의 텅 빈 주말 홀로 걷는 나는 문득 너를 떠올리고 휴대폰이 나도 몰래 너를 일깨운다 구월 초순의 한낮 매미 소리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멋울림* 음악은 사랑을 부르고 서로는 늦은 오후를 약속한다 가로수 잎마저 햇빛에 반짝이는 설레임은 이미 지난 봄날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해도 우리에겐 연륜이 담겨 있다 미니스커트 속 젊음은 아닐지라도 이슬에 젖어 촉촉해진 청춘이 있다 하늘은 다시 노을빛으로 타오르고 너와 나 가을밤의 온기를 껴안는다 * 멋울림 - '컬러링'의 한글 순화용어 [춘향문학 제 4집(2021년) 발표]

바람이 전한 가을 편지

바람이 전한 가을 편지 / 김신타 아무 때고 전화하고 문자 보내던 사람에게 연락하는 게 서먹해질 때 사방을 둘러봐도 하고 싶은 얘기 들어줄 사람 없을 때 나를 아는 사람이 아닌 내가 아는 사람 주위를 나는 맴돌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꽃필 때는 봄날이지만 그가 타인으로 느껴지는 때 나의 계절은 무슨 빛일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모든 게 나를 위해서 일어나지만 쓸쓸함은 나의 가을을 걷고 있다 흩날리는 낙엽처럼 가을바람이 전하는 발신인 없는 편지에 [춘향문학 제 4집(2021년) 발표]

건강이 최고라는 믿음

건강이 최고라는 믿음우리는 흔히 건강이 최고라고 얘기하며 또한 대부분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건강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게 나의 주장이다. 이는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몸과 마음의 건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믿음에 의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기도 하고 그와 반대가 되기도 한다.건강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건강이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면, 진짜로 중요한 것은 건강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이게 바로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이다. 생각으로 드러나는 현재 의식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드러나지 않는 잠재의식 속의 고정관념에 대해서는 심지어 어떠한 ..

천둥

천둥 / 김신타 하늘이 울리는 듯한 천둥소리에 잠결임에도 문득 귀가 열리어 내가 잘못한 일은 없는지 다시금 되새겨본다 죽음이 아닌 목숨을 구걸하는 애처로운 인간의 단상單像*이다 신의 사랑을 무조건적이 아닌 조건적인 것으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군상群像이다 군상 중 어느 하나의 모습 천둥소리 그치고 나면 불안도 두려움도 모두 잊어버리는 꿈결에도 가슴 졸이며 몸의 수명을 스스로 주관하고자 하는 어리석고 애처로운 한 인간이다 60을 넘긴 나이임에도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목숨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내가 바라는 바 있으면서도 기꺼이 내려놓는 삶이고 싶다 불만스러운 속내일 때 있으나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이고 싶다 이것이면서 또한 저것이기도 한 나, 이율배반적인 나를 깨닫는 삶이고 싶다 *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