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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동체 一心同體

일심동체 一心同體 깨달았다고 해서 물리적으로 '나'라는 게 없어지는 건 아니다. 깨닫고 나면 내 몸이 없어지고 늘 오르내리던 산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몸 마음과 일심동체라고 믿어왔던 허상의 내가 없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허상의 내가 없어지더라도 실재하는 무형의 나는 여전히 그대로다. 몸 마음과 일심동체라고 믿어온 허상의 나는 눈에 보이고 오감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즉 실재하는 무형의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오감으로 느껴지지도 않기 때문에, 허상의 내가 사라지고 나면 몸을 비롯한 모든 물질적 대상 역시 사라지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런 착각을 다른 사람도 아닌, 허상의 나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즉 무아를 깨달은 선각자들이 예전부터 해왔으며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러..

깨달음의 서 2024.10.09

깨달은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깨달은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깨달았다고 해서 일상생활에서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또는 구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자신한테 닥쳐온 어떤 상황으로 인해서 자신이 행복하다거나 또는 불행하다는 등의 구분을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물리적인 구분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구분을 하지 않음이다. 자기한테 이익이 되고 안 되고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살아온 자기 경험이나 기억 등에 따른 두뇌 작용에 의해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면의 울림에 따라 의사를 결정한다. 지금 당장은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는 것 같은 일이 있어도 내면의 울림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이것이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이일 뿐 그 나머지는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데 행•불행을 구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깨달음의 서 2024.10.09

시작이 있을 뿐 끝은 없다 2

시작이 있을 뿐 끝은 없다 2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끝이 없을 뿐 시작은 있다. 시작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깨닫게 되면 그 깨달음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 깨닫기 이전에는 없었던 세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세계가 기존의 세계와 중첩되어 새롭게 시작된다. 기존의 세계와 중첩되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는 것일 뿐이다.그리고 깨달음 중에서도 가장 큰 깨달음인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과 다르지 않다. 이 물질계에서 오감으로 느껴지는 몸, 그리고 의식으로 느껴지는 마음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깨달음의 서 2024.10.09

무아와 깨달음

무아와 깨달음 무아라는 건 어떤 한계가 주어진 내가 없다는 뜻이다. 또는 어떤 범주 안에 들어있는 나란 없다는 뜻이다. 자신을 둘러싼 한계를 없애거나 또는, 스스로 자신을 집어넣었던 어떤 범주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에게는 깨달음을 얻었다, 대자유함을 얻었다는 느낌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이제는 자신을 둘러싼 아무런 울타리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한계나 범주라는 울타리가 자신을 보호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까지의 많은 노력으로 그러한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아라는 건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주위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둘러쳐진 울타리 즉 한계나 범주가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 갇혀 있었던 한계나 범주라는 울타리가 사라지니까, 제한되었던 '허상의 ..

깨달음의 서 2024.10.06

시작이 있을 뿐 끝은 없다

시작이 있을 뿐 끝은 없다 견성이란 시작일 뿐이다. 자신의 성품을 보았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시발점에 선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쉽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견성성불이라는 말도 맞는 말이다. 견성하면 그것이 곧 부처(붓다)가 되는 것이라는 뜻인 견성성불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바대로는 아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견성하게 되면 우리는 대부분 지금의 나와는 다른, 부처라는 어떤 다른 존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는 어떤 신비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성품을 보기 이전의 자신 즉, 중생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품을 본 사람이 바로 부처일 뿐이다. 그래서 견성성불이며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을 불교에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견성이란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자신의 ..

깨달음의 서 2024.10.05

고요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 2

고요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 2 나는(우리는) 물질세계에 있지 않은 신 神이다. 즉 물질세계에는 내가 없다. 그래서 무아 無我인 것이다. 깨달은 분들은 일찍이 무아와 공 空을 말씀했으며, 진공묘유 眞空妙有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여기서 공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공간 개념에서의 텅 빈 허공이 아니라, 시간이나 공간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의 텅 빔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나'라는 존재는 감각의 세계인 물질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물질계를 벗어난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텅 빈 미지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미지의 세계에 나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이자 전체이며 또한 절대인 존재와 함께 존재한다. 전체이기에 하나이며 절대이기도 한 존재를 우리는 보통 신 神이..

깨달음의 서 2024.09.09

도 道란 무엇일까?

도 道란 무엇일까?분별에서 벗어나는 것 또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게 '도'가 아니라, 감각에서 벗어나는 게 바로 도입니다. 우리가 오감 즉 감각에서 벗어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감각에서 벗어난다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감각에서 벗어나는 단적인 예가 바로, 멀쩡히 서 있는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처음으로 지동설을 주장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의한 재판과 심지어 이탈리아의 '조르다노 부르노'라는 카톨릭 수사이자 철학자는 발가벗겨져 화형까지 당했습니다.아무튼 우리는 감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감 중에서 대표적인 감각은 다름 아닌 시각일 텐데요, 시각적 오류는 앞에서 예를 든 지동설에서처럼, 지구가 도는 게 아니라..

깨달음의 서 2024.09.03

내가 없는 것이지 세상이 없는 게 아니다

내가 없는 것이지 세상이 없는 게 아니다 이 세상이 가짜인 게 아니라, 이 세상에 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가짜입니다. 즉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현실의 세상이 아닌 보이지 않는 내면에 내가 존재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객체인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주체인 내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주체인 내가 아니라 객체인)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가짜라고 잘못 알아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감을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보이지 않는 내면에 존재하는 '나'입니다. '내면에 존재하는 나'를 우리는 특별히 '참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무튼 '나'라고 부르든 '참나'라고 부르든 '내면..

깨달음의 서 2024.08.25

믿음에서 깨어나다

믿음에서 깨어나다 / 김신타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닌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기쁨 주는 사람만이 아닌 내게 상처를 주는 존재도 나를 사랑하는 영혼이다 앎이 달라서도 아니고 처지가 달라서도 아니며 서로의 믿음이 다를 뿐이다 초월이란 공간적인 도약이거나 시간적인 이동을 뜻하지 않으며 자신이 가진 믿음을 뛰어넘는 일, 자신의 믿음을 초월한 곳에 기적이 있고 신비가 있으며 소망하는 현실이 거기 있다 믿음에서 깨어난 병아리 꽃처럼 소망하던 봄날이 눈발 속에서도 다가온다

신작 詩 2024.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