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가 모두 분별 (또는 분별의식)인 것이 아니라, 생사 즉 삶과 죽음이란 실존이다. 생사가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생사 자체가 아니라 생사에 대한 판단이 곧 분별일 뿐이다. 삶은 좋고 바람직하며, 죽음은 회피해야 할 대상이고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 등이 바로 분별이요 분별의식이다.
그런데 많은 선각자들은 생사가 모두 분별이라고 얘기한다. 이는 그들의 내면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여전히 남아있어, 이를 스스로 외면하기 위한 자기최면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엄연한 현실이며 실존이지 이게 어찌 분별이라는 말인가? 분별이라면 삶과 죽음이 지금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 이래 삶과 죽음의 모습이 지금과 달랐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벌거벗고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모습 그대로이지 않은가?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생사가 분별이 아니라, 생사에 대한 우리 각자의 판단이 분별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판단이 있고 선호가 있음은, 즉 분별이 생기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생존에 대한 두려움 등등이 우리로 하여금 분별을 하게 한다. 고로 분별을 하지 않으려면 원인인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 진실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죽음보다 삶을 선호할 이유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보다 죽음을 선호할 이유도 없을 터이고.
그런데 많은 선각자들은 생사가 모두 분별이라고 얘기한다. 이는 그들의 내면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여전히 남아있어, 이를 스스로 외면하기 위한 자기최면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엄연한 현실이며 실존이지 이게 어찌 분별이라는 말인가? 분별이라면 삶과 죽음이 지금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 이래 삶과 죽음의 모습이 지금과 달랐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벌거벗고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모습 그대로이지 않은가?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생사가 분별이 아니라, 생사에 대한 우리 각자의 판단이 분별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판단이 있고 선호가 있음은, 즉 분별이 생기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생존에 대한 두려움 등등이 우리로 하여금 분별을 하게 한다. 고로 분별을 하지 않으려면 원인인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 진실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죽음보다 삶을 선호할 이유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보다 죽음을 선호할 이유도 없을 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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