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 25

봄 안부

봄 안부 강인호 당신 없이도 또 봄날이어서 살구꽃 분홍빛 저리 환합니다 언젠가 당신에게도 찾아갔을 분홍빛 오늘은 내 가슴에 듭니다 머잖아 저 분홍빛 차차 엷어져서는 어느 날 푸른빛 속으로 사라지겠지요 당신 가슴속에 스며들었을 내 추억도 이제 다 스러지고 말았을지 모르는데 살구꽃 환한 나무 아래서 당신 생각입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저 분홍빛이 그대와 나 우리 가슴속에 찾아와 머물다 갈 건지요 잘 지내 주어요 더 이상 내가 그대 안의 분홍빛 아니어도 그대의 봄 아름답기를 「좋은 생각」 2009년 4월호에서

홍어

홍어 / 이정록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년이다 양쪽 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우눈으로 웃는다 개업한 지 십팔년하고 십년 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저 늙은네는 곰삭은 젓갈이다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좆을 내온다 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 꽃잎 한 점 넣어준다 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 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 밤늦도록 홍어좆만 주룩럭거렸다고 만만한 게 홍어좆밖에 없었다고 얼음 막걸리를 젓는다 얼어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우리집 큰놈은 이제 쓸모도 없는 거시기만 남았다고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막걸리 거품처럼 웃는다 이정록, 2010

슬픈 도시락

슬픈 도시락 / 이영춘 춘천시 남면 발산중학교 1학년 1반 류창수 고슴도치같이 머리카락 하늘로 치솟은 아이 뻐드렁 이빨, 그래서 더욱 천진하게만 보이는 아이, 점심시간이면 아이는 늘 혼자가 된다 혼자 먹는 도시락, 내가 살짝 도둑질하듯 그의 도시락을 훔쳐볼 때면 아이는 씩- 웃는다 웃음 속에서 묻어나는 쓸쓸함, 어머니 없는 그 아이는 자기가 만든 반찬과 밥이 부끄러워 도시락 속으로 숨고 싶은 것이다 도시락 속에 숨어서 울고 싶은 것이다. 어른들은 왜 싸우고 헤어지고 또 만나는 것인지? 깍두기조각 같은 슬픔이 그의 도시락 속에서 빼꼼히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늑대

늑대 / 김성수(金聖秀) 네 성껏 욕해다오 나는 가난한 네 목덜미를 움켜 핏줄기 솟구칠 때에도 너를 동정하지 않았다 나는 네게로 피에 주린 이빨을 세워 바람처럼 달려갔다 네 고통과 죽음 그런 높은 생각들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다만 길들여지지 않는 본능으로 척박한 이 땅에 침엽(針葉)처럼 살아내야 했을 뿐 그러나 가끔씩 서러움이 눈발처럼 쏟아지는 밤 네 피로 물든 툰드라 언덕에 비명같이 달빛 번지는 밤 싸늘한 한기 등줄 적시고 내가 삼킨 이름들이 무서리로 짖눌러 내리는 밤 어찌하지 나는... 먼 하늘 고개 젖혀 우-우- 몰수이 울어야 하는 이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