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그리고 또 61

환승

환승 김석기 문상 마치고 나오는 길 대화는 사람 죽은 얘기다 저번에 누가 상 당했는데 미처 알지 못해서 못 갔다는 둥 너무 젊은 나이에 안 됐다는 둥 나도 한마디 거든다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은 것 아니냐고 끝없는 여행길 기차를 타고 가도 좋고 버스를 타고 가도 좋으며 기차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도 좋은 것 아닌가 장례식장 환승역에 때아닌 환송객들로 붐빈다 죽음이란 하나의 삶을 끝맺는 것임과 동시에 또 다른 삶으로 환승하는 것임에도 장례식장마다 환송하는 가족, 친지, 지인들로 붐빈다. 정작 당사자는 이미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기에 환송식이 한창인 장례식장엔 그저 그림자만 남아있을 뿐인데.

詩-그리고 또 2020.04.03

바람의 바램

바람의 바램 / 신타 글을 쓸 때면 가끔 신호위반을 하곤 한다 바라다, 의 명사형은 바램이 아니라 바람이라고 그것의 과거형은 바랬던, 이 아니라 바랐던, 이라고 맞춤법 신호등은 빨간 불인데 나는 그냥 직진을 하는 것이다 자장면은 어쩐지 싱거워 나도 모르게 짜장면을 주문하곤 한다 된장 맛 나는 장맛비 대신 장마비라고 쓰고 싶은 장마철이다

詩-그리고 또 2020.04.03

생명 4

생명 4 김석기 사람과 동물의 사체를 두려워하는 이여! 집을 짓고 책을 만드는 나무와 종이가,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이, 동물과 식물의 사체가 아니고 무엇이랴 꽃병에 꽃을 꽂는다 해서 꽃병이 꽃이 되는 게 아니듯 진흙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해서 진흙이 생명이 되는 게 아니다 신이 부여한 생명은 영원하리니 진흙이 아닌 그대의 생명은 영원하리라 몸이 아닌 그대의 생명은 영원하리라

詩-그리고 또 2013.05.10

스스로 그리 하라

스스로 그리하라 김석기 그리해선 안 되기 때문에 그리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만 그리해도 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리해선 안 된다고 배웠을지라도 배운 것에 안주하지 마라 배움은 사색의 동굴을 지나는 안내자일 뿐 스스로 동굴을 벗어나라 그리해서는 안 되거나 그리해야만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리하지 않거나 스스로 그리하는 것이다

詩-그리고 또 2013.05.10

읍면동

읍면동 김석기 먼 도시가 아닌 가까운 시골에 산다는 게 어두웠던 시절이 있었다 삼천리보다는 삼천동이라 말하고 싶었으며 금수군 강산면이 아닌 금수시 강산동에서 살고 싶었던 멀리 우뚝 솟은 산보다 가까이 네모난 아파트가 우람하고 굽이치며 흐르는 강보다 곧고 반듯한 아스팔트가 시원하게 다가오던 시절이 있었다 아파트보다 시골집이 부럽고 동사무소보다 면사무소가 가깝게 느껴지는, 이제는 오늘도 반갑군 또오면 어떠리 산 3번지에서 나는 살고 싶다

詩-그리고 또 2013.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