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67

수용과 거부 그리고 선택 (사랑, 두려움, 자유의지)

수용(사랑), 거부(두려움) 그리고 선택(자유의지) 나는 천사일 수도 있고 악마일 수도 있다. 이렇게 양변을 모두 수용하는 게 바로 중도이자 중용이다. 양변을 잘라 없애고 가운데 있는 어느 한 지점만을 선택하는 건, 중도나 중용이 아니라 하나의 부분일 뿐이다. 풍요와 가난도 마찬가지다. 나는 부자일 수도 있고 가난뱅이일 수도 있다는 허용과 인정 즉 받아들임(수용)이 필요하다. 건강과 병약도 마찬가지로 양쪽 모두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가운데 건강을 선택하는 것이지, 그러지 않고 어느 한쪽인 건강과 풍요 그리고 천사만을 수용하고 다른 한쪽을 거부하는 건, 가운데 있는 길을 걷는 게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친 길을 걷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선택은 밖에 있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안에 있는 마음에서 ..

보물찾기

보물찾기 태초에 생각, 말(말씀), 움직임이 있었다. 여기서 움직임이란, 무형 無形인 생각과 말이 고정된 게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뜻이다. 또한 생각을 '의식'으로, 그리고 말을 '소리'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상관없다. '태초에 우리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 있었을 뿐 아니라, 무형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있었으며, 역시 무형의 존재임에도 고정됨이 아닌 움직임이 있었다'라고 이를 바꾸어 써도 적절할 것이다. 물질 우주 이전부터 존재하는 무형의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이 존재함을 의식하는 능력과 스스로 말을 할 수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무형임에도 무언가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태초부터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무형의 세계가 바로 우리의 내면이다. 지금 우리에게 눈..

정체성의 꼰대

정체성의 꼰대 4번의 허물을 벗으면서 약 25일간 몸집이 10,000 배 정도 자란다는 누에처럼, 사람도 유치원에서부터 입학과 졸업을 반복하며 육체적, 정신적 성장을 거듭한다. 다만 누에 등 다른 동물과 달리 사람은 한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넉잠 자고 난 누에가 스스로 자신을 가두기 위해 누에고치를 짓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정체성 확립의 시기인 청소년기가 있다. 누에가 고치 안에서 번데기로 성장하듯, 사람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다음 확립된 정체성 안에서 정신적 안정과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번데기가 되었을 때 누에는, 고치 안에서 계속 번데기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나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방이 되어 고치를 뚫고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반면 사람의 경우에는 누에와 달리, 정신적인 누에고..

몸에 밴다는 말

몸에 밴다는 말 예전에 탔던 자전거나 스케이트를 몇십 년이 지난 다음 다시 탈 경우에도, 타는 방법을 잊어버리지 않았을 때 우리는 이를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만 깊게 생각해본다면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몇십 년은 고사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모든 세포가 교체된다. 몸이 예전의 몸이 아닌데 어떻게 몸이 기억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몸이 여전히 예전의 몸과 같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착각의 산물이다. 근육은 말할 것도 없이 뼈조차도 6개월이면 모든 세포가 새롭게 바뀐다는 게 과학이 밝혀낸 지식인데, 우리는 이를 망각하고 있음이다.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거의 망각하는 채로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 덕분에 우리는 몇십 년 전에 몸에 익혔던 일을, 처음 배울 때와 같은 ..

시간의 광야

시간의 광야 우리는 흔히 시간을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는 선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 더욱이 현재는 장구한 과거와 안갯속 같은 미래 사이에 있는 아주 짧은 순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그랬다. 그러나 60대에 들어서면서 내게는 현재가 찰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현재라는 순간을 스치듯 지나가면 과거가 되는 게 아니라, 벌판처럼 펼쳐진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어느 한 지점의 기억을 과거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과거라고 부르는 현재와 미래라고 부르는 현재가 있을 뿐, 과거와 미래란 있을 수 없다. 지평선이 보이는 현재라는 광야에서, 저 멀리 기억나는 한 지점을 과거라고 여기지만, 그 모든 곳은 하나도 빠짐없이..

감각기관과 전자기기

감각기관과 전자기기 인간에게 있어 눈과 귀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각기 전자기기로 비유할 수 있겠다. 눈은 고정된 VR기기 (Virtual Reality ; 가상 현실)이며, 귀 역시 고정된 블루투스 이어폰이다. 우리가 어릴 때는 사물이나 풍경을 동영상으로 보지 못하며, 마치 즉석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는 것처럼 한 장면씩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러다가 점차 성장하면서 사물이나 풍경을 평면이 아닌 입체로 인식하게 되고 또한, 정지된 화면이 아닌 동영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 입체적으로 볼 수 있을 때부터 우리는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예측할 수 있으며 또한, 두 지점 사이의 시간도 예측이 가능하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 눈은 평면을 찍는 사진기가 아니라, 평면을 보는 순간 입체적 동영상인 가상 현..

이성 理性이란

이성적 지식이란 일어난 현실을 어떻게 기쁘게 받아들이느냐와 함께,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그대로 받아들이느냐에 집중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지, 현실 또는 감정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평가, 분석, 판단, 추론하고 결정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이성이란 오직 자신에게 일어난 현실과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생리와 심리와 윤리에 대하여

생리와 심리와 윤리에 대하여 (고미숙 고전평론가의 글을 보고) 윤리란 자기규정일 뿐이다. 우리는 흔히 윤리가 사회 또는 하늘에서 정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윤리란 각자의 의식 안에서 만들어진다. 물론 타인의 말이나 글을 참고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혼자 독단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기에 윤리가 외부 세계에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외부에 있는 타인의 언행을 참고해서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자신이 만든 윤리에 대한 자기규정 (우리는 이를 관념이라고 칭한다)에 따른 행동이, 타인의 윤리 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타인의 행동이 또한 내 윤리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식이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처럼 서로 연결된 구조다. 결론적으로 윤리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명령도 아니며, 또한 어느 한 사람..

고정관념과 믿음에 대한 단상

고정관념과 믿음에 대한 단상 고정관념의 다른 이름은 믿음이다 믿음을 아무리 포장지로 포장해도 단단하게 고정된 관념일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화석화된 기억이거나 그러나 고정관념이든 믿음이든 무조건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현실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드는 믿음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믿음을 보다 굳건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애를 써왔던가 따라서 고정관념이든 믿음이든 이름을 가지고 따질 게 아니라 삶에 유용한가 아닌가를 따져 버려야 할 건 아낌없이 버리고 간직할 건 간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고정관념이든 믿음이든 믿음이 곧 고정관념이며 고정관념이 곧 믿음임을 바로 알아 믿음과 고정관념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일이다

실체와 허상

실체와 허상 우리는 자기 신체의 오감을 통해서 지각되는 대상이 실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것을 실체라고 믿기도 하는데 이는 착각일 뿐입니다. 오감의 대상은 수시로 변하는 것이자, 실체가 아니라 잠시 동안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결국에는 사라져버리는 허상 또는 환영일 뿐이죠. 그리고 정말로 변하지 않고 영원히 실재하는 실체는 바로, 무 無 또는 텅 빈 침묵인 나 (또는 참나)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유 有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 無가 존재해야 한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이 유형의 바탕 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는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착각입니다. 지구와 태양 등 우주를 생각해본다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단단한 땅 즉 지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