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 넝쿨 아래

[스크랩] 어느 할머니의 일기

신타나몽해 2009. 5. 8. 05:47

아흔 할머니의 일기


"내 나이 아흔, 세상 떠날날이 머지 않았지… "

올해 아흔인 홍영녀 할머니는 매일 일기를 쓴다
학교 문턱을 밟아 본 적이 없는 그는
일흔이 돼서야 손주에게 한글을 배웠다

까막눈에서 벗어난 이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홍 할머니는
삐뚤빼뚤 서툰 글씨에 맞춤법조차 엉망이지만
20여년 동안 써 온 그의 일기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


세상과 이별할 날이 머지않은 그의 일기를 통해
누구에게나 닥칠 노년의 삶과, 인생이란 무엇인지
조용히 자신을 뒤돌아보게 한다.

    ?

      "이 내 마음 누가 달래 주나"

      "그 누가 이 내 마음을 달래 주나"

      "청개구리는 무슨 사연으로

      저다지 슬픈 소리로…"


      "
      나는 쓸쓸해, 가슴이 서러워…"

      오늘도 흰 머리카락 날리면서
      산 마을로 너머 가시는 햇님은
      어김없이 너머 가시네.
      햇님 나는 나는 쓸쓸해.
      가슴이 허전해. 가슴이 서러워.



      인생은 바다위에 떠 있는 배가 아닐까
      흘러 흘러 저 배는 어디로 가는 배냐.
      앞쪽으로 타는 사람은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뒤쪽으로 타는 사람은 그 누구를 기다리네..



      아직 어두운데…,햇님이 나오셨나
      햇살이 고개를 들면 그는 창가로 다가가
      햇님에게 인사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한 시골마을에서 300여평 남짓한 텃밭에
      무, 배추, 호박, 가지, 고추 등
      갖가지 농사를 지으며 사는 홍 할머니.
      밭일을 하는 동안 그는 외롭지도 아프지도 않다

      자식 같은 농작물을 매만지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잘 들리지 않아도 TV를 켜 놓으면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6남매를 둔 홍 할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자식들이 서로 모시겠다고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가 혼자를 고집하는 이유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변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느냐”
      자식들이 걱정하면 그는
      "그렇게 죽는 게 복”이라고 대답하며
      혼자이기를 고집한다.


      헌 내복을 입고 밭일하는 홍 할머니
      홍 할머니는 새 내복 보다
      낡디 낡은 헌 내복을 더 좋아한다
      아들, 딸, 조카들이 사다 준 새 것을 마다하고
      헌 내복을 입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다 버리려고 했던 내복을 또 빨아 입었다
      낡은 내복을 입는다고 딸들은 야단이다

      새 내복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딸들이 사다 준 내복 조카들이 사 온 내복들이
      상자에 담긴 채로 쌓여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 자꾸 새 것 입어
      휘질러 놓으면 뭐하나 해서다

      그리고 새 옷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을 보면 헌 옷을 입어도 뿌듯하다
      나 죽은 후에 다른 없는 이들 입게 주면
      얼마나 좋으랴 싶다

      그런 에미 맘을 모르고
      딸년들은 낡은 옷을 버리라고 야단이다




      홍 할머니가 닦고 또 닦았던 고무신
      딱히 외출할 계획도 없는데
      설레이는 마음으로 고무신을 닦아
      햇볕에 말린 홍 할머니

      하지만 갈 곳이 없어 고무신에
      다시 먼지가 쌓이고
      그는 신어 보지도 않은 채
      더러워진 고무신을 또 닦아 햇볕에 내 놓는다

      그는 이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뽀얗게 고무신을 닦아 햇볕에 내놓았다
      어디 가게 되지 않으니
      신어 보지도 않고 다시 닦게 된다
      어디든 떠나고 싶다




      가슴에 묻은 자식 생각에
      눈물짓는 홍 할머니
      어린 자식이 숨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젊은 시절의 아픈 기억과
      살날 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노년의 외로움이 절절이 담긴 그의 일기는
      그만의 일기가 아니다

      배고프고 힘든 시절을 꾸역꾸역 참고 살아온
      한 여인의 일기요
      우리네 어머니의 일기이며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일기다


    
    

     


    출처 : 퐁당퐁당 하늘여울
    글쓴이 : 이룻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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