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석 교수의 2008년 한국일보 칼럼>>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 되는데도
아들인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그 결과는 1학년 여름방학 때 성적표로 나타났다.
1학년 8반, 석차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갖고 고향으로 가는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석차 1/68로 고쳐 아버지에게 보여드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 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 제. 이번에는 1등을 했는가 배’ 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 제’ 했다.
당시 아버지는 처가살이를 했고,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 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서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살이 되던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뒤늦게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시작하려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그만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 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박찬석
-1940년 9월 生, 경남 산청,
-경북대학교 13,14대 총장
-2004년 17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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