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의원(민주당, 비례대표)은 현재 본업은 국회의원이지만 오늘
강연에서는 시인의
모습이었다.
'시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열린 봉하 마을
강연(6월 8일)에서 도종환 시인은 '슬픔'
을 화두로 패배와 상처, 인생을 풀어내는 사이사이 신작을 포함한 6편의 시를 낭송했다.
작년 대선 이후 어려웠던 심경을 써내려간 시였다.
시 낭송을 겸한
이날 특강은 시인의 육성과 실내를 가득 메운 청중들의 마음이 어우러져
흡사 '인생수업'을 받는 듯했다.
시인이 풀어낸
'슬픔'의 비밀
도종환 시인은 '상실은 가장 큰 인생수업'이라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유고작
(<상실 수업>)을 인용하며 슬픔을 이야기해 나갔다. 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수용의 단계로.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뭔가 잘못됐어'라며
고통스런 상황을 '부정'하는 것은 슬픔의 감정
이 닥쳐오는 속도를 더디게 하는 일종의 내부
방어막입니다."
처음에 그는 <눈>이라는 신작시와 <이릉 대전>이라는 신작시를 낭송하였다.
'이릉 대전'은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전투를 말하는데 유비가 70만 대군을 이끌고 연전
연승하다가, 마지막 싸움이자 질래야 질 수 없는 싸움인 이릉에서 대패하고는 이듬해
홧병으로 죽었다는 고사에서 보듯이 작년 대선에서 질래야 질 수 없었던 선거에서 지고는
그 아픔을 시로 승화한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그러다가 슬픔의 실체가 분명해 지면 '분노'의 단계로 넘어가는데 '당신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 어디서 뭐했어?' '신이 있다면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며 대상을 가리지 않고
쏟아냅니다. 죄책감은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입니다. 분노는 잃어버린 사랑의 양과
비례
해서 다가오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줘야 합니다. 이 분노는 나중에
저항의 힘이 됩니다."
분노의 상태와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는 '타협'의 단계. 만약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하느님 우리 아이 유치원 갈 때까지만 살게 해주세요", "죽어서 사랑하는 사람
을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라는 심리적 요청은 "스스로를 다독이고 치유하려는 과정"이라고
한다. 강한 감정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되지 않으려는 일종의 쉼, 정거장의 역할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기존작 <겨울 저녁>이란 시를 읽어주었다.
눈이 그쳤는데 그는 이제 아프지 않을까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나는 내내 아팠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드는 동안
내 안에 저녁 노을처럼 번지는 통증을 그는 알까
그리움 때문에
아프다는 걸
그리움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그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왜 그리움은 혼자 남아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눈은 내리다 그쳤는데
눈발처럼 쏟아지던
그리움은
허공을 헤매다 내 곁에 내린다 아프다 <겨울 저녁,
전문>
그리고 찾아오는 깊은 절망.
"밥도 넘어가지 않고 어떤 것에도 관심이 가지 않는 상태예요. 하지만 절망감은 비탄에 빠져 있는 동안 신경체제를 닫게 만들어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입니다. 꼭 지나쳐야 하는 단계죠.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싶다가도 불시에 다시 찾아옵니다. 그러나 절망은 우리가 성숙할 수 있게 마음의 준비를 시켜주지요. 이 시기를 잘 보내면 평소에 다가가지 못했던 영혼의 깊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줍니다."
이제 슬픔을 '수용'하는 마지막 단계로
나아간다. 그는 이때 "서둘러 눈물을 닦지 말고 흐르
게 둘 것, 마음의 안부를 물어 볼 것"을 권한다.
"수용은 직면한
상황이 마음에 들어서나 이상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닙니다. 잃어버린
모든 것을 인정하고 상실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요. 지금은 다만, 천천히 깊은
슬픔의 통로를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보여준 시가 정치를 하면서 쓴 시"라며 소설 <레 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예를 들었다.
"빅토르 위고는 극작가였고 시인이었어요. 다양한 문학 작품 활동을 하다 혁명에
동참했습
니다. 공화주의자였기에 나폴레옹 등장 이후 망명했고, 돌아와서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그
뒤 다시 작가로 돌아와 <레 미제라블>을 썼지만 빅토르 위고를 작가로 기억하지 않습니까?
저도 후세에 무엇으로 기억될지 알 수 없는 거죠."
"삼국지의 주인공은 관우, 장비, 유비라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이 세 명이 다 죽어도
삼국지
는 끝나지 않아요. 9, 10권이 계속 이어집니다. 주인공이 죽어도 역사는 계속 되는 거예요.
추사 김정희는 유배지로 가던 중에 해남 땅 끝에 있는 대흥사에 들러 이광사가 쓴 현판을
보고 자기 글씨로 다시 써서 그걸 걸어놓고 떠났어요. 여전히 오만했던 거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기의 존재가 잊혀지고 가문이 몰락하면서 철저한 고립의 시간을 지냅니다.
그러더니 9년 반의 유배 생활이 끝나고 돌아가면서 대흥사에 들러 이렇게 말해요. '지난번에
내가 내렸던 현판 있는가. 내 글씨를 내리고 본래의 것을 걸어라'라고요. 그랬기에 추사체가
완성의 길로 갔다고 생각해요. 이 고난의 시간을 견디는 방법은요, 스스로 낮아지고, 깊어지는
겁니다."
이 이야기와 함께 추사가 유배되었던 제주도의 모슬포에서 쓴 시 <모슬포>가 낭송되었고
역시 신작시 <슬픔의 통로>가 그의 육성을 타고 흐를 때, 시인을 만드는 것은 저것이구나 하는
점을 새삼 느꼈다.
<중략>
지도를 만든 것은 오랜 방황과 잃어버린 발자국
기도를 알게 한
것은 고통이 아니었을까
사랑을 가르친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
경전을 쓰게 한 것은 해결할 수 없는 고뇌
시인을 만든 것은 열망이 아니라 슬픔이 아니었을까 <슬픔의 통로,
부분>
마지막으로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담쟁이>의 육성 낭송을 끝으로 강연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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