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김치에 비유한 깨달음

무아 신타 (無我 神陀) 2020. 2. 24. 15:39

맛있게 익은 김치를 맛보려면 먼저 배추를 소금에 절여 숨을 죽이는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우리의 현재 의식 즉 표면 의식을 잠재의식 내지 심층 의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표면 의식을 심층 의식으로 바꾸는 과정이 바로 배추에서는 소금을 뿌려 절이는 것이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깨달음에 대하여 마음속에서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안 되는구나 하고 스스로 깨달음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우리는 깨달음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 것입니다. 배추가 소금에 절여져 왕성한 의욕이 사라지고 풀 죽어 있을 때 김치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표면 의식에서 포기를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깨달음을 추구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잠재의식 즉 심층 의식에서는 여전히 깨달음을 찾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깨달음 쪽을 선택하곤 합니다.

 

제 경우에도 다른 카페 회원으로부터 소개받은 몽지릴라 유튜브를 들으면서도 무슨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냥 재미있어서 반복해서 계속 들었던 것이지요. 그러다 딱 열흘만에 이어폰 끼고 예의 유튜브 법문 듣다가 문득 초견성을 한 것입니다.

 

하여튼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깨달음에 대한 열망을 자신의 의식 표면에서 내면화시키라는 것과 또 하나는 깨달음에 대한 어떠한 상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갖고 있는 깨달음에 대한 환상이 우리 자신의 깨달음을 더디게 만듭니다.

 

여기서 다시 김치에 대한 비유로 돌아가겠습니다. 김치는 숨이 죽고 난 뒤 양념과 함께 버무려진 다음 다시 일정한 숙성기간을 거쳐 맛있는 김치가 되는 것처럼, 우리도 표면 의식에서는 포기를 했을지라도 잠재의식에서는 끊임없이 기존의 지식과 새롭게 받아들이는 외부의 가르침 등을 버무려 스스로 숙성시킵니다.

 

숙성되는 기간 동안 배추 스스로 맛있는 김치에 대한 어떠한 기대나 환상을 갖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한 아무런 기대나 환상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김치가 맛나게 익는 순간이 오는 것처럼 흩어져 있던 우리의 지식도 문득 하나의 실에 꿰어지는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주의를 환기하고 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배추가 다듬어지고 소금에 절여지는 때부터 김치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뿐 밭에서 자라는 과정은 간과합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추구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이를 거의 놓칩니다.

 

그러나 깨달음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구도를 위한 수행에 진입하기 이전의 과정 즉 김치를 담그기 위하여 밑동이 잘라지기 이전의 과정도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속이 꽉 차고 노랗게 익은 배추가 김치를 담갔을 때도 맛있게 되는 것처럼 본격적인 구도행 이전에도 숙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외부가 아닌 내면을 돌아보는 생활 태도 말입니다.

 

이러한 생활 태도가 구도행으로 이어져,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외부가 아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며,  내면을 자주 돌아볼 때 우리는 깨달음에 조금씩 조금씩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신이 거기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깨달음의 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안에 있는 세상  (0) 2020.02.28
무상 고 무아  (0) 2020.02.25
무아無我란 무엇인가?  (0) 2020.02.23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ㅡ 2  (0) 2020.02.21
사랑이란? (믿음 소망 사랑)  (0) 2020.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