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세계와 육적 세계
"내가 없으면 우주도 없다" 라는 말은 얼핏 보면 그 자체로 모순인 것도 같지만, 형이상학적 우주든 물질 우주든 모든 게 내 안에, 즉 나의 내면에 존재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유형의 물질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무형인 인간 영혼이 먼저 창조되었다.
유형의 물질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모든 존재는 무형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즉 유형의 물질 우주 이전에 무형의 형이상학적 우주가 있었던 것이며, 영적 세계는 지금도 무형의 형이상학적 우주 그대로이다. 따라서 무형의 영적 세계를 유형의 물적 세계에 비추어 유추하고 상상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대표적인 게 바로 진화론과 창조론이다. 진화론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창조론조차도 우주의 창조를 얘기하면서 유형의 우주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무형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적 세계도 유형의 물질 우주와 비슷하게 유추해서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을 상상해내었으며, 또한 이를 굳게 믿고 있다. 스스로 모순된 상상을 하고 있음이다. 육신이 아닌 영혼에게, 맨발에 가시밭길과 꺼지지 않는 유황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육신이 죽어 땅속에 묻히거나 화장되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육신을 통해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어리석은 염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 세계에서는 육신도 없으며 육신의 고통도 없다. 많은 임사체험 사례들이 이를 보고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육신을 통해 고통을 받는 것을 상상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벌을 주는 주체가 신이라니? 무조건적인 사랑의 신이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무자비한 폭군으로 만드는 이윤배반적인 상상을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하고 있음이다.
지상에서의 고통도 모자라서 천상에서도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죽고 나서 영적 세계에서도 고통을 받는 삶을 살고 싶다면, 그건 그의 선택일 뿐이니 내가 관여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자기 혼자서 벌을 받기는 억울하다며 타인까지 끌어들이지는 말라. 혼자서 지옥을 믿든지 말든지 알아서 할 일이지, 소위 전도라는 이름으로 같이 고통을 받자며 권유하지는 말 일이다.
지상에서의 고통이란, 기쁨을 주기 위한 즉 깨닫게 하기 위한 고통이다. 고통을 위한 고통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한 고통인 것이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삶이 편안할 때 우리는 그 상황에 안주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조차 권태로워져 삶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잔인한 행동에 쾌감을 느끼게 된다.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르게 해놓고는 이를 바라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네로 황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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