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부처와 그리스도

신타나몽해 2021. 10. 2. 12:53
부처와 그리스도


생각하고 기억하며 오감을 통해서 느끼는 그 무엇이 바로 나 즉 참나다. 이 몸뚱이가 내가 아니라 몸뚱이라는 수단 내지 도구를 통해서, 무형의 내가 생각하고 오감을 느끼며 기억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몸뚱이가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나 즉 우리는 언제나 존재한다. 다만 몸뚱이를 통해서 우리는 감각 즉 냄새를 맡고 맛을 보며 촉감과 질감을 느낄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육체에 의해 한정되는 지구상에서의 삶을 기꺼이 선택한 것이다.

지구상에서의 삶은 무형의 영혼인 내가 선택한 것으로, 육체적이고 물질적이며 상대적인 한계를 지닌다. 한계가 있지만 모험 가득한 스릴 넘치는 삶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사는 지구상에서의 육체적 삶이다.

고로 우리는 육체적 삶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즉 육체가 100년 전후로 살다가 죽는다 해서 우리도 따라 죽는 게 아니라, 우리는 육체의 수명과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한다. 우리는 유형의 몸뚱이가 아니라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유될 수는 있으나 감각되거나 관찰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인 무형의 영혼이다. 영혼에 몸과 마음을 더한 게 바로 우리 인간이다. 따라서 기본 바탕은 영혼이지 몸 또는 마음이 아니다. 즉 우리 자신은 몸이나 마음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말이다.

영혼이 주체가 되어 몸의 감각과 마음의 감정을 느끼고 체험하고자 하는 게 곧 우리 인간 삶의 목적이다. 즉 인간 삶이란 하나의 과정이다. 무한한 영적 삶 중에서 육체로서의 삶이란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체험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으로서의 삶은 100년도 채 안 되는 육체적 삶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고로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즉 패러다임을, 육체적 나에서 영적 나로, 유형의 몸뚱이에서 무형의 영혼으로, 물질적 몸이라는 한계에서 한계가 없는, 영원하고 무한한 나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게 곧 깨어남이다. 그리고 패러다임의 전환이 몸으로 체득되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깨달음이라고 하며, 완전히 패러다임이 바뀌었을 때 우리는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불교식으로는 부처가 되는 것이며 기독교식으로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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