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

신타나몽해 2021. 10. 2. 12:34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


카카오 스토리(이하 카스)에 뜬, 6년 전 오늘 내가 올린 글을 보다가 친구의 댓글을 보게 되었다. 친구는 딱 1년 전인 작년 가을에 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는데, 링크된 그녀의 카스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자신을 빼닮았다며 유난히 좋아했던 손녀 사진과 함께 그녀가 웃고 있다.

인터넷이 없던 우리 어렸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지금은 당연한 일이 되고 있다. 그녀의 사진을 보다가 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는 얼마쯤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거리가 있기는 하는 걸까? 그녀는 지금 내 안에 있는데.

예전 같으면 사후 세계를 지하 어디쯤 있는 음습한 곳으로 상상했겠지만, 책과 인터넷을 통해서 임사체험에 관한 정보를 여러 번 접해본 나로서는 이제 정반대의 상상을 한다. 사후 세계는 지상에 있는 어떠한 밝음보다 더 밝은 곳이며, 지상의 어떤 기쁨보다 더한 기쁨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러기에 죽은 자가 원한을 품고 산 자를 해코지할 것이라는 상상은 참으로 허무맹랑한 것임은 나는 이제 안다. 홍콩에서 살았던 「아니타 무르자니」라는 인도 출신의 여성은, 그녀가 경험한 임사체험을 기록한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쪽 세상의 아름다움과 자유를 남겨두고 떠나왔다는 슬픔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동시에 이곳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다시 만나고 행복해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하기도 했다. 아쉬움과 기쁨의 눈물이 동시에 흘렀다.」

그렇다. 그녀는 저쪽 세상 즉 사후 세계에 있을 때 처음에는 지상의 삶으로 되돌아오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삶으로 돌아와 지긋지긋한 말기 암의 고통을 다시금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자신의 몸에 있는 암이 즉시 치유되리라는 사실이 문득 느껴져 그녀의 결심이 바뀌게 된 것이다.

아무튼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보다 죽은 자의 세상인 저승이 훨씬 더 아름답고 밝게 빛나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기에 나는 죽은 친구의 카스를 둘러보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가 있을 수 없다. 두려움이 거리감을 만들어 낼 뿐, 내 안에 그녀가 있고 그녀 안에 내가 있다. 나라는 영혼 안에 육체가 있는 것이지, 내 육체 안에 영혼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영혼의 현현 顯現이며, 100년 안팎을 사는 일시적인 수단 또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p.143 / 저자 - 아니타 무르자니, 번역출판 - 샨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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