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생리와 심리와 윤리에 대하여

신타나 2022. 3. 20. 05:11

생리와 심리와 윤리에 대하여
(고미숙 고전평론가의 글을 보고)


윤리란 자기규정일 뿐이다. 우리는 흔히 윤리가 사회 또는 하늘에서 정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윤리란 각자의 의식 안에서 만들어진다. 물론 타인의 말이나 글을 참고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혼자 독단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기에 윤리가 외부 세계에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외부에 있는 타인의 언행을 참고해서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자신이 만든 윤리에 대한 자기규정 (우리는 이를 관념이라고 칭한다)에 따른 행동이, 타인의 윤리 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타인의 행동이 또한 내 윤리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식이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처럼 서로 연결된 구조다. 결론적으로 윤리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명령도 아니며, 또한 어느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공통의 자기규정을 모아 사회적으로 약속을 정해놓은 것이 바로 윤리, 즉 관습. 도덕 또는 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라면 시대에 따라서도 변하지 않아야 하며,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국가나 민족에 따라서도 달라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윤리 의식은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며, 같은 지역의 사회 구성원일지라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윤리란 자기규정들이 모여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인데, 관습이나 도덕은 불문률로 각자의 기억 안에 저장되고 법률은 성문률 즉 문자로 정해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우리 몸은 피와 근육과 뼈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의 말씀처럼 생리와 심리 그리고 윤리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무위와 유위, 당위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하나로 연결한다면 다음과 같이 회통될 것이다.

무위란, 심장의 박동처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몸의 피와 같고 생리적이며 자연적이다. 다음 유위란, 무위와 당위의 중간에서 양쪽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몸의 근육과 같고 심리적이며 인위적이다. 마지막 당위란 학습이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관념으로서, 무위와 유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면서도 생리와 심리를 지배한다. 당위는 또한 몸의 뼈와 같이 단호하며 윤리적이고 이성적이다.

무위 - 피     - 생리적 - 자연적
유위 - 근육 - 심리적 - 인위적
당위 - 뼈     - 윤리적 - 이성적

도표로 만든다면 위와 같다. 이 중에서 얼핏 생각해보면 당위 즉 뼈와 윤리. 이성이 제일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없어도 되는 것의 첫 번째가 바로 이것이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되는 것처럼 윤리와 이성이 없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반면 생리 현상과 자연이 없다면 육체적으로 존재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심리적인 의도와 의지가 생기지 않아서, 그 결과 인위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육체는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위라는 건 사회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필요한 것이며, 여기에서 윤리가 필요하고 이성이 빛을 발하게 될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전체 인류가 무의식적으로 당위의 지배를 받는다. 세대를 거쳐서 이어진 관념과 학습의 결과다. 심지어는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당위에 신의 명령이라는 권위를 덧붙이기도 한다. 그럴 때 당위는 누구도 쉽게 거스를 수 없는 엄청난 무게로 인간 정신을 억누르게 된다.

스스로 만든 자기규정의 노예가 되어 고통받으며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신의 명령이라는 게 있을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으면서 또 이래라저래라 명령을 한다는 건 그 자체로 모순 아닌가. 또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주장도 모순이긴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지 않고 신의 뜻대로 하면서 인간의 잘못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그리고 신이 자기 뜻대로 할 거라면 굳이 인간을 창조할 것도 없이, 신 혼자서 북치고 장구 치면 될 일이지 왜 인간을 창조한단 말인가. 내가 주장하는 결론은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으며,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어떤 행동도 신의 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가 곧 신의 자유의지이므로, 인간에게 신에 의한 처벌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신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을 처벌한다는 상상은, 신이 신 자신을 처벌한다는 상상과 다를 바 하나 없다. 천국에 있는 신이 자신을 지옥으로 보내 고통을 준다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일 뿐이다.

신과 인간은 둘이 아닌 하나다.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의미는 속성이 하나라는 뜻이다. 속성이 같지 않은데 어떻게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줄 수 있겠는가? 하나이면서 다른 모습일 뿐이다. 마치 프랙탈 현상과도 같이 말이다. 또는 수많은 레고 조각이 모여 하나의 형상을 이룬다거나 매스게임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의 상상 속에 있는 신은 허상일 수도 있다. 신이란 전체이기 때문이다. 인간 중에서 누가 자신을 포함한 전체를 볼 수 있겠는가? 이는 거울 없이 자기 눈을 스스로 볼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과도 같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도 신의 형상을 볼 수 없다. 신이 환영으로 자신을 잠시 나타내 보일 수는 있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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