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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신神

잃어버린 신神 신이란 나로부터 어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나와 늘 함께 하는 즉 내가 바로 신이다. 신은 무소불위無所不爲한 존재이므로 나에게서 떨어져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내가 곧 신이자 동시에 세상 모든 게 곧 신이다. 이 세상에 신 아닌 게 없다. 심지어 허공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대상까지도 모두가 신이다. 따라서 인간인 우리는 신 안에서 독립된 존재이지만, 신의 의지 안에서 자유의지를 가지는 것이며 또한, 모든 존재는 신의 형상 안에서 형상을 가질 뿐이다. 즉 신은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형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가장 높은 것에서 가장 낮은 것까지, 가장 아름다운 것에서 가장 추한 것까지, 그리고 가장 선한 것에서 가장 악한 것까지 신 아닌 게 없다. 그래서 신은 전지전능..

깨달음의 서 2021.05.09

푸른 계절

푸른 계절 신타 꽃은 눈을 들뜨게 하나 잎은 눈을 차분하게 하며 붉고 흰 꽃도 아름답지만 푸른 산과 들도 시원하다 빨라지는 절기 때문인지 사월임에도 온 세상이 푸르다 이따금씩 이팝나무 꽃송이 눈이 배부르게 담겨있는 계절 보릿고개 지난 지 한참이건만 마음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 임산부 좌석에 앉아야 할 너나 할 것 없이 만삭임에도 마음의 충만은 멀기만 하다 옆에 있는 아카시아꽃 따 먹어도 좋으련만

신작 詩 2021.05.03

홍어 / 이정록

홍어 / 이정록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년이다 양쪽 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우눈으로 웃는다 개업한 지 십팔년하고 십년 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저 늙은네는 곰삭은 젓갈이다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좆을 내온다 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 꽃잎 한 점 넣어준다 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 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 밤늦도록 홍어좆만 주룩럭거렸다고 만만한 게 홍어좆밖에 없었다고 얼음 막걸리를 젓는다 얼어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우리집 큰놈은 이제 쓸모도 없는 거시기만 남았다고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막걸리 거품처럼 웃는다 이정록, 2010

슬픈 도시락 / 이영춘

슬픈 도시락 / 이영춘 춘천시 남면 발산중학교 1학년 1반 류창수 고슴도치같이 머리카락 하늘로 치솟은 아이 뻐드렁 이빨, 그래서 더욱 천진하게만 보이는 아이, 점심시간이면 아이는 늘 혼자가 된다 혼자 먹는 도시락, 내가 살짝 도둑질하듯 그의 도시락을 훔쳐볼 때면 아이는 씩- 웃는다 웃음 속에서 묻어나는 쓸쓸함, 어머니 없는 그 아이는 자기가 만든 반찬과 밥이 부끄러워 도시락 속으로 숨고 싶은 것이다 도시락 속에 숨어서 울고 싶은 것이다. 어른들은 왜 싸우고 헤어지고 또 만나는 것인지? 깍두기조각 같은 슬픔이 그의 도시락 속에서 빼꼼히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가지치기

가지치기 신타 목이 잘리고 팔조차 없는 흉상으로 다듬어진 가로수 그곳에서 새싹이 움트는 모습 내 목과 팔이 잘린 것처럼 아파하고 슬퍼할 게 아니라 그들이 보여주는 자연을 읽자 떨어지고 버려졌기에 새순이 돋아나는 것임을 생명이라는 행간을 읽어내자 사랑스러운 팔과 목 비록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생명의 숨소리 영원하지 아니한가 오른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 내버리라는 바이블 구절이 바로 마음을 가지치기하라는 뜻 아니겠는가

신작 詩 2021.04.24

텅 빈 침묵 2

텅 빈 침묵 2 / 신타 나는 영화 속 장면이거나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스크린이자 텅 빈 바탕이다 영화 속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온갖 사건이 일어난다 해도 나는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함을 자각하면서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는 공산주의 사상에 눈과 귀가 멀었던 시절만큼이나 거칠 게 없어졌다 그러나 처음 깨달았을 때는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었지만 더 깨닫고 나니 예전처럼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더라는 송나라 청원 선사의 말씀 일찍이 전해진다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에 빠져 스크린의 존재 잊어버렸다가 이를 다시 기억하게 되면 이번엔 스크린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스크린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 우주에 있는 것 중에서 무엇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

자기규정을 버려라

자기규정을 버려라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자기규정을 버린다 해도 자기규정은 끊임없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규정을 만들어내며 그러한 자기규정은 에고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자기규정인 에고를 혐오하면서도 자기규정 즉 에고에 파묻혀 살아가는 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기규정 즉 에고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상태가 바로 깨달음이다. 이처럼 깨달음이란 이미 완성된 어떤 순간이거나 상태가 아니라, 완성으로 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이제 막 지난 것일 뿐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고속도로 입구를 아직 찾지 못했거나, 또는 고속도로보다 산과 들이 더 좋은 사람인데 반해 깨달은 사람은 고속도로에 이미 들어선 것이다.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함은 더는 방황과..

깨달음의 서 2021.04.23

나를 표현하다

나를 표현하다 / 신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라는 논어 첫 구절 다음에 '배우고 익힌 것을 표현할 때 기쁨은 기쁨을 낳으리라' 라는 구절 하나 더 넣고 싶다 안으로 감추고 숨기는 게 아니라 배우고 익힌 뒤 나를 표현하는 것 드러내놓고 나누는 사랑이리라 먹고 마시는 이유가 열정적으로 살기 위함이지 살을 찌우기 위함이 아닌 것처럼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이유가 혼자서만 즐겁고자 함이 아니라 나누고 베풀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태어나 몸으로 살아가는 것 나를 드러내고자 함이리라 꽃으로 향기를 품고 열매로 씨앗을 맺는 것 나를 표현하는 것이리라

詩-깨달음 2021.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