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
ㅇ 외부의 나와 내면의 나
외부적으로 나라는 게 없을 뿐 내면적으로도 나라는 게 없는 건 아닙니다. 불교 경전을 보아도 무아를 가르치고 있으나, 석가모니는 임종 직전에 「자귀의」하라는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무아와 자귀의는 서로 대치되는 내용일까요?
얼핏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석가 생존 시의 어휘가 많지 않아 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아를 말할 때의 나는 외부적인 나를 말하며, 자귀의를 말할 때의 나는 내면적인 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의문이 쉽게 풀립니다.
석가 생존 당시 힌두교의 아트만은 외부적인 나를 뜻하기에 석가세존은 이를 부정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무아론입니다. 즉 외부적인 나의 직업이나 출생에 따라 신분이 영원히 윤회한다는 게 힌두교 사상의 근간인데 2천 5백 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를 부정했습니다.
현세에서의 신분이나 직업이 영원히 윤회하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힌두교에서는 견성 해탈을 하는 것이고 싯다르타는 이를 내세가 아닌 지금 당장 잘못된 믿음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싯다르타는 무아를 설파했습니다. 그리고는 불가촉천민이나 여성 등에 대한 아무런 차별이 없이 이들을 모두 승단의 일원인 비구와 비구니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했음에도 나중엔 마지막 가르침으로 자등명자귀의 법등명법귀의 自燈明自歸依 法燈明法歸依 에서 '자귀의' 하라고 설법한 것은 '무아'를 번복한 게 아니라, 내면의 자신의 믿고 내면의 자신에게 귀의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면적인 나를 자각하는 게 곧 견성 즉 깨달음입니다. 외부적인 나 즉 자신의 몸을 비롯한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 또는 관념이나 감정 등이 실체적인 나 자신이 아니라, 보이지도 않고 쉽게 느껴지지도 않는 내면에 있는 무형의 존재가 바로 실체로서의 나 자신입니다.
고로 무아라는 불교의 주장에 대하여 그럼 무엇이 견성을 하고 성불을 하느냐는 질문에, 지금까지는 불교계에서조차 답변이 궁색했으나, 이제부터는 외부 세계에서의 나라는 관념은 허상이자 환영이지만, 내면의 나를 자각하는 게 곧 견성이고 성불이라고 대답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외부적인 나 즉 우리 몸에 대한 관념이 허상이며 환영에 불과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쓸모없는 대상인 것만은 아닙니다. 비록 허상이자 환영일지라도 그 모두는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허상이자 환영이기 때문입니다.
ㅇ 외부 세상은 늘 그대로다
이 세상에 선과 악 또는 정의와 불의 등등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일어나는 일과 내 판단이 존재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과 받아들일 수 없는 일, 또는 인정할 수 있는 일과 인정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일어나는 일과 그것에 대한 우리 저마다 내면의 판단과 수용 그리고 거부가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인 우리는 외부 세상에 정해진 무엇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나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외부 세상에는 마치 물과 바람처럼 다만 흐르는 현상이 있으며, 그것을 나누고 재단하는 '판단'이 우리 내면에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어나는 현상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정의도 아니고 불의도 아닙니다. 다만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우리가 분별하고 판단하여,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등으로 나누는 것일 뿐입니다.
고로 자신의 내면에 분별 즉 판단을 없애기만 한다면 우리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등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그렇다면 그게 무슨 인간이 사는 모습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의 편에 서야 하고 정의의 편에 서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입니다. 그리고 또한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편은 선이고 정의지만, 타인 또는 타인이 속한 편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이미 밝혔듯이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등등이 외부 현상계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설명해도 우리는 악과 불의 등이 외부에 즉, 타인 또는 타인이 속한 집단에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있음입니다. 자신의 안에 있는, 즉 내면에 있는 분별인 판단 기준을 스스로 없애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밖에 선한 일과 악한 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저마다 우리 내면에 선한 일. 악한 일. 선한 사람. 악한 사람에 대한 분별 기준이 있을 뿐입니다. 고로 분별 기준을 스스로 없애기만 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겁내지 마세요. 선악이 없는 세상이라 해도 지금과 다를 바 하나 없습니다. 우리 저마다의 내면세계가 바뀌는 것이지, 오감으로 감각되는 외부 현상계가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외부 세상은 늘 그대로입니다.
ㅇ 외부의 나와 내면의 나
외부적으로 나라는 게 없을 뿐 내면적으로도 나라는 게 없는 건 아닙니다. 불교 경전을 보아도 무아를 가르치고 있으나, 석가모니는 임종 직전에 「자귀의」하라는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무아와 자귀의는 서로 대치되는 내용일까요?
얼핏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석가 생존 시의 어휘가 많지 않아 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아를 말할 때의 나는 외부적인 나를 말하며, 자귀의를 말할 때의 나는 내면적인 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의문이 쉽게 풀립니다.
석가 생존 당시 힌두교의 아트만은 외부적인 나를 뜻하기에 석가세존은 이를 부정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무아론입니다. 즉 외부적인 나의 직업이나 출생에 따라 신분이 영원히 윤회한다는 게 힌두교 사상의 근간인데 2천 5백 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를 부정했습니다.
현세에서의 신분이나 직업이 영원히 윤회하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힌두교에서는 견성 해탈을 하는 것이고 싯다르타는 이를 내세가 아닌 지금 당장 잘못된 믿음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싯다르타는 무아를 설파했습니다. 그리고는 불가촉천민이나 여성 등에 대한 아무런 차별이 없이 이들을 모두 승단의 일원인 비구와 비구니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했음에도 나중엔 마지막 가르침으로 자등명자귀의 법등명법귀의 自燈明自歸依 法燈明法歸依 에서 '자귀의' 하라고 설법한 것은 '무아'를 번복한 게 아니라, 내면의 자신의 믿고 내면의 자신에게 귀의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면적인 나를 자각하는 게 곧 견성 즉 깨달음입니다. 외부적인 나 즉 자신의 몸을 비롯한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 또는 관념이나 감정 등이 실체적인 나 자신이 아니라, 보이지도 않고 쉽게 느껴지지도 않는 내면에 있는 무형의 존재가 바로 실체로서의 나 자신입니다.
고로 무아라는 불교의 주장에 대하여 그럼 무엇이 견성을 하고 성불을 하느냐는 질문에, 지금까지는 불교계에서조차 답변이 궁색했으나, 이제부터는 외부 세계에서의 나라는 관념은 허상이자 환영이지만, 내면의 나를 자각하는 게 곧 견성이고 성불이라고 대답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외부적인 나 즉 우리 몸에 대한 관념이 허상이며 환영에 불과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쓸모없는 대상인 것만은 아닙니다. 비록 허상이자 환영일지라도 그 모두는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허상이자 환영이기 때문입니다.
ㅇ 외부 세상은 늘 그대로다
이 세상에 선과 악 또는 정의와 불의 등등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일어나는 일과 내 판단이 존재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과 받아들일 수 없는 일, 또는 인정할 수 있는 일과 인정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일어나는 일과 그것에 대한 우리 저마다 내면의 판단과 수용 그리고 거부가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인 우리는 외부 세상에 정해진 무엇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나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외부 세상에는 마치 물과 바람처럼 다만 흐르는 현상이 있으며, 그것을 나누고 재단하는 '판단'이 우리 내면에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어나는 현상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정의도 아니고 불의도 아닙니다. 다만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우리가 분별하고 판단하여,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등으로 나누는 것일 뿐입니다.
고로 자신의 내면에 분별 즉 판단을 없애기만 한다면 우리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등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그렇다면 그게 무슨 인간이 사는 모습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의 편에 서야 하고 정의의 편에 서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입니다. 그리고 또한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편은 선이고 정의지만, 타인 또는 타인이 속한 편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이미 밝혔듯이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등등이 외부 현상계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설명해도 우리는 악과 불의 등이 외부에 즉, 타인 또는 타인이 속한 집단에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있음입니다. 자신의 안에 있는, 즉 내면에 있는 분별인 판단 기준을 스스로 없애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밖에 선한 일과 악한 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저마다 우리 내면에 선한 일. 악한 일. 선한 사람. 악한 사람에 대한 분별 기준이 있을 뿐입니다. 고로 분별 기준을 스스로 없애기만 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겁내지 마세요. 선악이 없는 세상이라 해도 지금과 다를 바 하나 없습니다. 우리 저마다의 내면세계가 바뀌는 것이지, 오감으로 감각되는 외부 현상계가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외부 세상은 늘 그대로입니다.
'깨달음의 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안에서의 관념 (0) | 2020.12.11 |
---|---|
외부 세상은 늘 그대로다 (0) | 2020.12.07 |
감정과 관념 그리고 언어 (0) | 2020.08.27 |
희망과 절망을 넘어 (0) | 2020.08.24 |
나다움 또는 정체성 (0) | 2020.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