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희망과 절망을 넘어

무아 신타 (無我 神陀) 2020. 8. 24. 00:56

희망의 끈 끊어진 다음엔
절망의 끈조차 내려놓아라


1.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울에 비유하는 글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란 단순히 형상만을 비추는, 즉 흔히 보게 되는 유형의 거울이 아니라, 내면의 기억을 담아내는 무형의 거울이죠. 기억에는 시각적인 상은 물론 이려니와 청각, 후각, 미각, 촉각적인 상 그리고 기억된 상 등등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불교적으로 접근하면 '색성향미촉법'이 되며, 여기서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는 이를 '인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안이비설신의'에서의 '의'를 나는 '뇌'라고 해석합니다. 지금부터 2천5백 년 전인 석가모니 생존 시에는 뇌라는 지식도, 개념도 없었을 것이므로 당연히 그러한 단어도 없었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색수상행식'에서 '식'을 나는 '기억' 또는 '앎'으로 해석합니다. 오감이 있다 할지라도 이를 기억하는 앎이 없다면 오감이라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긴 오감이라는 감각뿐만 아니라 생각과 감정 등등 이 세상 어떠한 것도 기억 또는 앎이 아니라면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따라서 기억과 앎은 스스로 존재하며, 모든 것은 태초에 존재하는 기억 또는 앎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태초에 기억 또는 앎이라는 에너지가 존재하는 것이죠. 기억 또는 앎이라는 존재가 곧 우리 자신이며 또한, 우리 자신이 곧 기억이거나 앎입니다. 모든 것은 기억이나 앎에서부터 시작되어 기억이나 앎으로 영원합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된 상'의 홍수 속에 빠지느냐, 아니면 여기서 벗어나느냐가 자신에 대한 깨달음의 관건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 선종에서, 백척간두 진일보 내지 절벽에 뻗은 나무를 잡은 손마저 놓으라거나, 기독교 수도원 전통에서 절벽 앞에 서있는 제자를 스승이 뒤에서 밀어버리니 절벽 위로 날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중으로 한 걸음 더 내딛으라거나, 낭떠러지에 뻗은 나뭇가지 잡은 손을 정말로 마저 놓으라는 뜻이거나, 또는 믿음을 가지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다름 아닌 지금까지 희망에 넘쳐 추구해왔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절망에 빠졌을 때, 그 절망마저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온갖 노력을 다해왔던 것이 물거품 되어 아무런 희망이 없을 때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을 부여잡고 있었던 것과 똑같이 이번엔 절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희망을 포기한 뒤 붙들고 있는 절망조차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조차 포기하는 것이 바로, 더는 내디딜 곳이 없는 곳에서 진일보하는 것이고, 절벽에 있는 나무를 붙잡고 있던 마지막 손마저 놓는 것이며,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행동입니다. 높은 데서 떨어져 다치거나, 절벽에서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떨어져 죽는 게 진일보가 아니라 말입니다.

석가여래가 6년 고행을 통해서도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모든 희망이 사라지자,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길바닥에 쓰러졌다가 마침 옆을 지나던 처녀로부터 우유죽을 얻어먹고는 기운을 되찾았을 때, 그는 그 순간 절망조차 내려놓고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있다가 어느날 새벽 샛별을 보는 순간 문득 자기자신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희망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절망마저 내려놓는 게 바로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것이고, 벼랑 위에서 나무를 잡고 있던 손을 놓는 것이며, 믿음을 갖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행동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추구한 깨달음이라는 희망을 포기한 뒤 붙잡게 되는 절망마저 포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일이지 않을까요?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예정된 국왕 자리도 박차고 궁궐을 벗어난 젊은 고타마 싯다르타에게는 특히 말입니다.

석가여래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 대한 깨달음 내지 자각에 이르는 약이기도 합니다. 희망의 끈이 끊어진 다음에 무의식적으로 붙잡게 되는 절망의 끈조차 우리 스스로 놓아버릴 때,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좀더 상세히 설명해보죠.

2. 고타마 싯다르타처럼 희망과 절망을 넘어서야 합니다. 희망도 포기해야 하지만 절망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쳐 떨어져 「내가」 무얼 한다는 생각이 없이, 그럼에도 깨닫고자 하는 내면 의지(또는 무의식적인 의지)만은 분명하게 가질 때, 우리에게 깨달음이라는 바람이 어디에선가 불어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다 또는 내가 무엇을 한다, 라는 생각을 비롯하여 어떠한 생각도 없을 때, 즉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 비로소 나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살며시 그리고 갑자기 찾아들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이다 또는 내가 무엇을 한다, 라는 생각을 없애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이것을 없애고자 석가모니 시대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몸 수련과 마음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만 해도 피골이 상접하는 고행을 6년 동안이나 했지만 결국 깨닫지 못하고 몸도 마음도 탈진되어 길에 쓰러졌다가,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죽 한 그릇 얻어먹고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나,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있다가 꿈에도 그리던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있었지만 그의 잠재의식 속엔,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깨닫고자 하는 내면 의지만은 분명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는지는 스스로 몰랐지만, 깨닫는 방법을 몰랐기에 오히려 그는 겸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깨달음은 오로지 겸손한 이성에만 담깁니다. 스스로 깨닫는 방법을 더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절망했지만, 희망을 버린 것처럼 절망에도 안주하지 않고 과감히 버렸을 때, 비로소 가을바람처럼 깨달음이 우리 곁을 스칩니다. 모름이라는 텅 빈 곳에서만 깨달음은 어둠처럼 스며듭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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