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사랑과 애착

신타나몽해 2021. 5. 15. 12:22


사랑과 애착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책에서 니체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극복해서 위버멘쉬 또는 초인이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며 나아가 자신의 몸마저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몸조차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요즘 들어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라는 가르침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유형적인 빼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유형의 물질을 덜어내는 것이든 기억된 관념을 덜어내는 것이든 말이다. 아무리 우리가 빼고 덜어낸다 해도,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형적이고 물질적인 재산이나 자신의 신체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단지 마음속에 가진 그것들에 대한 애착 또는 집착을 포기하라는 말이다. 내가 사는 집이나 살림살이에 대한 애착을 내려놓아도 그것들이 어디로 달아나지 않으며, 내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버린다 해서 내 몸이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생각 즉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포기한다고 해도 그게 없어지는 건 아니다. 한마디로 모든 걸 내려놓거나 포기한다고 해도 모든 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내려놓고 포기한다는 게 다만 두려움을 버리는 일일 뿐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기존의 고정된 관념을 초월할 수 있다.

그리고 초월한다는 것은 새로운 능력을 얻거나 무언가를 뛰어넘는 일이 아니라, 단순히 기억을 되찾는 일이다. 물론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가 될 터인데 그게 바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포기란 어쩌면 진공상태와 같을 수 있다. 기압이 낮은 곳으로 바람이 불듯이,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잃어버린 기억이 우리의 의식 안으로 스며들게 된다. 이때가 바로 깨어남의 순간이다. 깨어남이란 다름 아닌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것일 뿐이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뚱이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관념들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집과 차와 돈을 버리고 또한 자신의 몸과 생각도 버리라는 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애착과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이 소유하는 물질과 자신 내면의 관념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버리고 포기한다는 게, 그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재산과 신체 등 물질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고 물론 물질을 떠받드는 것도 아닌, 다만 물질을 물질로써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물질 즉 자신의 신체와 돈을 비롯한  재물이 들고 나는 것을 내 의지 안에 두고자 애쓰지 말고 그것들에 자유의지를 부여하라는 말이다. 나 자신 (영혼 또는 참나)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신체와 재산을 내 손 안에 움켜쥐려고 하지 말 일이다. 나와 늘 함께하는 신체와 재산을 다만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담담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내 소유이거나 내게 속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갖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물질을 대하라는 말이다. 또는 동반자적 관계로 자신의 신체와 재산을 바라볼 때 그것들과의 관계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일방적인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존중하는 수평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되 애착하거나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다. 내 몸뚱이가 나 자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예처럼 움직이는 존재도 아니다. 돈이나 재물도 몸과 마찬가지다. 그것들을 나 자신과 독립된 존재로 존중하고 사랑하라는 말이다.

나만이 신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는 몸과 돈을 비롯한 유형 무형의 모든 존재가, 신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독립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은 말할 것도 없으며 내가 옮겨주어야 하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나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독립된 존재이다.

그것들을 내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존재로 보고 존중할 때, 그것들과 나와의 관계가 원활해진다. 이게 바로 애착이나 집착이 아닌 사랑이다. 몸과 돈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사랑할 때 그들도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들이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인 것이다. 그들은 어차피 스스로 의지를 가지지 못하는 수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형의 내가 먼저 의지를 내어야만 몸이 따라 움직이는 것이며, 내가 먼저 사랑을 주어야만 돈도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과 애착 (또는 집착)을 구분하라. 사랑은 어떠한 대가를 바라거나 기대하는 바 없이 수평적이며 동반자적인 관계에서 서로 존중하는 것이며, 애착은 어떠한 기대나 대가를 바라고 행하는 수직적이며 일방적인 방식으로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다.

사랑이란 의존이 아니라 독립적이며 자율적이다. 반면 애착이란 일방이 타방을 배려하고 조종하는 의존적인 관계다. 배려라는 게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라면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현실은 배려와 동시에 타인의 자율과 자유를 침해하려드는 게 보통이다.

신이 위대한 점은 인간사회에서 학살과 전쟁 또는 자연재해와 같은 참혹한 일이 일어나도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럴 때 신이 나서서 악인들을 응징해주고 자연재해를 없애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신이 나서는 순간 우리는 신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생명은 몸과 함께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 깨우치지 못한 소치이다. 우리의 생명은 몸에 달린 게 아니다. 자동차가 폐차되었다고 내 몸이 죽는 게 아닌 것처럼, 내 몸이 죽는다고 해서 생명이 함께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내 몸뚱이와 상관없이 나 자신인 생명은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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