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무형의 실상

신타나 2021. 11. 23. 15:49
무형의 실상
 

우리 눈을 비롯한 오감으로 지각되는 것은, 유형의 실상이 아니라 무형의 허상이다. 유형이 아니라 무형이며, 허상이거나 환영인 것이다. 유형의 실상이 빛 또는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우리 몸에 있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거쳐 인식되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은 유형의 실상이지만, 우리에게 인식될 때는 무형으로 인식된다. 즉 유형의 실상이 우리 눈에 와닿고 뇌에 담기는 게 아니라, 무형인 빛으로 와닿고 빛에 의한 상으로 바뀌어 담긴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유형으로 인식되는 것은,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착각일 뿐, 우리 의식 안에는 무형의 허상으로 담겨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유형으로 존재하는 실상이다.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마치 환영이거나 허상이었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며, 더 먼 세월을 상정한다면 모든 유형의 실상이 물과 바람이 되어 사라지겠지만, 어쩌거나 지금은 실존하는 물상이다.

반면 우리가 오감을 통해 받아들인 물상은 모두가 허상이며 환영이다. 눈에 보이는 땅과 하늘 등 지구와 태양을 비롯한 우주란, 감각적인 관념이거나 기억일 뿐이다. 인간의 의식 안에서는 실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더욱이 우리 몸이라는 것도 실상이 아닌 허상이다.

물론 대략 100년 정도 유지되는 우리 몸뚱이도 다른 물상과 마찬가지로 그 기간 동안은 실존하지만, 자신에게 인식되는 몸이란 한낱 관념이거나 기억일 뿐인 허상 또는 환영이다. 반복되는 설명이지만, 우리 몸이 자신의 눈 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빛에 의한 상이 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빛에 의한 상을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또는 청각이나 촉각 등 다른 감각과, 의식을 통한 관념이 하나로 융합된 기억을 자신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처럼 유형의 실상인 자신의 몸뚱이에 대한 상에 더하여, 기억까지 하나로 융합될 때는 난공불락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의 환영이거나 허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100년 정도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유형의 실상인 몸뚱이도 아니며, 몸에 대한 상 즉 우리 의식 안에 있는 관념이나 기억도 아니라면 도대체 나란 무엇일까? 나라는 게 있기나 한단 말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바처럼, 모든 게 공 空이므로 나라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걸까?

아니다. 내가 없을 수는 없다. 나라고 할 게 없다면, 지금 여기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물질이 화합하여 연기된 게 나라면, 물질이 스스로 화합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질을 화합할 수 있는 힘 즉 에너지를 나라고 할 수 있지는 않을까?

또한 무형의 실상이 있을 수도 있음이다. 유형의 실상이나 무형의 허상은 내가 아니지만, 무형의 실상이 바로 나일 수도 있음이다. 지구라는 상대적 물질계에 상대적인 존재만이 아닌, 절대적인 존재도 몸을 통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왜 우리는 신 또는 귀신은 상정하면서도, 인간이 바로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임을 상정하지는 못하는가? 우리 몸은 유형의 실상이자 상대적 존재이지만, 몸과 함께하는 '나'라는 존재는 절대적 존재이자 무형의 실상임을 왜 우리는 깨닫지 못하는가?

결론적으로 '나'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유형의 실상도 아니며, 관념 또는 기억 속에 있는 무형의 허상도 아닌, 항상하며 영원한 절대적 존재이자 무형의 실상이다. 내가 곧 전체로서의 신이자, 동시에 신의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깨달음의 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처럼 보이는 신  (0) 2021.12.01
없음의 있음  (0) 2021.11.30
인간이 사고의 틀을 갖고 있다는 칸트의 이론에 대한 비판  (1) 2021.11.20
본질과 실존  (0) 2021.11.18
지금 여기  (0) 2021.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