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인간이 사고의 틀을 갖고 있다는 칸트의 이론에 대한 비판

신타나몽해 2021. 11. 20. 00:30

방안에 들어와 갇힌 파리를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방문을 열어준다.
그러나 파리는 계속 창문에 헤딩하고 부딪친다.

파리의 두뇌에는 어두운 방문 쪽이 아닌 밝은 창문 쪽으로 날아가야 해방된다고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구리가 있다.
그의 코앞에 죽은 파리가 있다.
그러나 개구리는 움직이지 않는 파리를 먹지 않는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개구리는 먹지 않고 굶어 죽는다.

개구리의 두뇌에는 움직이는 곤충만 먹이로 인식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이다.
파리와 개구리는 왜 세상을 그렇게 인식하고 그렇게 이해하고 그런 식으로 엉터리로 볼까?

인간은 파리와 개구리와 다를까?
​철학자 칸트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자세히 밝혔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도 파리와 개구리와 다르지 않다.

인간은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기에 세상을 그렇다고 인식하는 게 아니고,
인간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보인다고 설파했다.

칸트의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서양 정신사상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가져온 일대 혁명이었다.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은 세상이 그렇게 생기었기에 우리가 그렇게 세상을 그렇게 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 두뇌에 세상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바라보게 만드는 정신적 모형이 있으며, 그 정신적 모형으로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다시 파리와 개구리의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파리는 밝은 곳은 열린 넓은 개방적인 곳, 어두운 곳은 갇히고 좁고 폐쇄적인 곳이라는 두뇌 모형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한다.

한편 개구리는 움직이는 작은 곤충은 먹을 수 있는 것, 움직이지 않는 작은 곤충은 먹을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는 정신적 모형(프로그램)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다.

(위 내용은 아래 URL에 있는 글 일부를 옮긴 것입니다.) https://m.cafe.naver.com/jaegebal/2911965

우주초고수다. 파리,개구리 그리고 칸트

우주초고수다. 파리,개구리 그리고 칸트 난 방안에 들어와 갇힌 파리를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방문을 열어준다 그러나 파리는 계속 창문에 헤딩하고 부딛친다 파리의 두뇌에는 ...

cafe.naver.com


그런데 칸트의 주장에 대한 내 반론은 이렇다. 우리 안에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것은 사고의 틀이 아니라 감각의 틀이다. 프로그래밍 된 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프로그래밍 된 대로 감각하지만, 감각을 바탕으로 해서 생각은 제멋대로다.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프로그래밍 된 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프로그래밍 된 대로 감각하면서 동시에, 감각을 통해서 얻은 자료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판단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이를 우리는 본능에 대하여 이성이라고 이름한다.

그래서 칸트 자신도 기존의 학설과 다른 학설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이지, 만약 그의 주장대로 우리가 모두 프로그래밍 된 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면, 그에게서 어떻게 새로운 학설이 나올 수 있겠는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쯤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른 이성이라는 사고 능력을 갖췄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물론 이것이 현대의 양자 물리학에서 근대의 고전 물리학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인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칸트의 학설 중에서 인간도 다른 동물과 같이, 프로그래밍 된 대로 행할 수밖에 없는 사고의 틀을 지녔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감각의 틀은 다른 동물과 똑같이 프로그래밍 되었다 할지라도, 자유로운 사고 능력을 별도로 가졌다고 나는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감각의 틀도 초음파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박쥐가 있고, 적외선을 이용하는 뱀과 자외선을 이용하는 나비가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라는 게 바로, 사고의 틀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방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종교나 사상이 우리에게, 특정한 사고의 틀을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경우가 어쩌다 있었고 지금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고의 자유는 있지만 감각의 자유는 없다. 프로그래밍 된 대로 감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또한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의 신체적 감각으로는 여전히 태양이 머리 위에서 그리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도는 것으로 보인다. 칸트의 주장대로 우리 인간에게도 사고의 틀이 주어졌다면, 우리는 아직도 천동설을 고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인류는 이미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밝혀냈으며, 대부분 지동설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이는 인류가 사고의 틀에 묶여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사유한다는 방증이다. 인류에게 사고의 틀 같은 건 없다고 봄이 타당하다. 문제는 감각의 틀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천동설에서 벗어나는 데만도 얼마나 많은 선각자들의 희생이 따랐는가.

결론적으로 다른 동물과 다른 감각의 틀을 가졌을지라도 어쩌거나 우리 인간은 자신이 가진 감각의 틀에서 쉽게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감각된 내용에 대한 판단과 해석에 있어서는 고정된 틀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나는 본다.

'깨달음의 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형의 실상  (0) 2021.11.23
'함이 없는 함'이라는 말  (0) 2021.11.20
본질과 실존  (0) 2021.11.18
지금 여기  (0) 2021.11.18
깨달음의 소리  (0) 2021.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