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의 있음
나라는 건 없음의 있음이다. 없음이기에 있다고도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내가 존재한다는 말. 말장난이 아니라 참으로 깊이 있는 내용이다. 내 안에 무엇인가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그것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 안에 있는 그것이 전부가 되기 때문이다. 더 확장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버리고 만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이 더러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은 사람도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우리가 늘 갇혀 있음을 경계하려는 뜻에서 하는 말일 뿐,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 없을 수는 없다. 깨달음도 있고 깨닫지 못함도 있으며, 깨달은 사람도 있고 깨닫지 못한 사람도 있다.
다음과 같은 비유가 적절할 것이다. 천동설을 믿다가 지동설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을 쳐다보며, "태양이 움직이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격이다. 우리 눈에는 분명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은 지동설을 안다는 이유로 태양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정지해 있다고 외쳐대는 꼴이다.
어리석음일 뿐이다. 깨달은 사람이라고 해서, 한꺼번에 모든 게 다 깨달아지는 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깨달았지만, 개구리가 올챙이 적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은 깨달은 사람이지만 그도 깨닫기 전에는, 깨달음을 추구했고 깨달은 사람 만나고 싶어 찾아다니지 않았을까?
깨달음도 없고 깨달은 사람도 없다는 말은 이미 깨달은 사람들끼리나 할 말이지,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깨달은 사람들이여! "이제부터라도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는 개구리가 됩시다. 앞으로는 깨닫고자 하는 사람들 헷갈리게 하는 말 하지 맙시다."
'깨달음의 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각의 힘 (0) | 2021.12.01 |
---|---|
바보처럼 보이는 신 (0) | 2021.12.01 |
무형의 실상 (0) | 2021.11.23 |
인간이 사고의 틀을 갖고 있다는 칸트의 이론에 대한 비판 (1) | 2021.11.20 |
본질과 실존 (0) | 2021.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