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바보처럼 보이는 신

신타나초 2021. 12. 1. 06:13

바보처럼 보이는 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생각은 존재한다.'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나'라는 개념보다는 생각 자체가 더 근원적이며,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고로 '생각'이 '나'라는 존재의 한 부분이라기보다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개념이 '생각'의 한 부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모든 개념은 생각 또는 의식이 존재한 이후에야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리가 아닌 직관으로 자신이 존재함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가능하겠으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논리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위 명제는 첫째, 의식이 없거나 스스로 생각을 하지 못하는 혼수상태나 수면 중에는 자신이 존재함을 부정해야 하며, 둘째로는 근본적으로 생각의 주체를 혼동하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구절은 내가 생각하고 있음을 단지 인식하는 것일 뿐, 정작 생각이 떠오르고 생각이 일어나는 순서나 방법 등을 알며 이를 실행하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어떤 이유에서 일어나며, 어느 순간에 일어나는지를 전혀 모르는 채 살아간다. 그런데도 데카르트의 위 명제는 내가 생각을 직접 만들어내고 관장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음이다.

컴퓨터를 빌려 이를 설명한다면 우리 인간은 컴퓨터 발명자도 아니고 또한 프로그래머도 아니다. 단지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 존재이며, 하드웨어 부분에서 가볍게 고장 난 부분을 고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음이다. CPU 등 주요 부품은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에만 손을 댈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

신이거나 또는 무 無인 우리 자신이, 유형의 몸을 거쳐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형의 몸으로서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무형의 영혼으로서 내가 몸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라는 게 내 주장이다. 몸으로서의 나는 생각을 인식하는 것 즉 이미 일어난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을 뿐, 생각 자체를 만들어내거나 스스로 제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자기 자신 또는 '나'로 믿는 몸이 나일 수는 없다. 앞서 얘기한 바대로 「나는 생각한다」라는 문장에서, 내가 생각을 일으키는 최초의 존재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생각을 인식하거나 자각하는 정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생각을 나중에서야 나는 알아차린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의식은 인식 자체까지도 의식하나, 인식은 의식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의식 자체는 제외하고 의식된 내용, 즉 의식 안에 담긴 감각. 생각. 감정. 의지. 기억 등등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의식이란 인식을 포함하는 모든 것이지만, 몸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 인간은 이미 의식된 것만을 인식할 수 있음이다.

즉 몸의 작용인 인식 작용은 이미 일어난 생각을 사후에 인지하는 것일 뿐, 근원적으로 생각을 일으키는 게 아니다. 고로 우리가 흔히 의식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의식이 아니라, 인식을 의식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을 뿐 의식하지 못한다.

의식이란 아무런 판단 없이 대상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지만, 인식이란 대상을 분별한 다음 선별된 것만을 받아들이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판단이 없이 대상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 즉, 인식이 아니라 의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본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깨달음을 거쳐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가 바로 이쯤일 것이다. 선과 악 모두를 인정하고 허용하는 신처럼, 현실 세계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지는, 신과 함께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음이다.

'깨달음의 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  (0) 2021.12.01
자각의 힘  (0) 2021.12.01
없음의 있음  (0) 2021.11.30
무형의 실상  (0) 2021.11.23
'함이 없는 함'이라는 말  (0) 2021.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