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본질과 실존

신타나몽해 2021. 11. 18. 23:17

본질과 실존
ㅡ 실존은 추론이다 ㅡ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주장처럼 실존은 분명 본질에 앞서지만, 본질을 모르는 상태에서의 실존은 공허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럽의 중세 시대처럼, 실존을 부정하고 본질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강요하던 시대로 돌아갈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주장하는 바처럼, 실존하는 모든 대상을 환영이라거나 허상으로 보는 견해에도 이제는 동의할 수 없다. 사실 실존이란 하나의 추론에 해당한다. 환영이나 허상이 아닌 추론인 것이다. 우리가 실존 또는 존재에 대하여 단지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물자체는 우리가 알 수 없고 다만 사유될 수 있을 뿐이라고 철학자 칸트는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칸트의 물자체가 무슨 뜻일까? 다름 아닌 실존을 다르게 표현한 용어라고 나는 본다. 물자체는 대상을 객체로 보는 입장이며, 실존은 대상을 주체로 보는 입장이라는 점이 서로 다를 뿐이다.

이상으로 본질에 관한 종교적인 관점에 더하여, 실존에 관한 철학적인 관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주장하는 바는 기독교 또는 불교의 관점도 아니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칸트의 물자체도 아니다.

본질을 알지 못하는 실존도 물론 공허하지만, 실존을 도외시하고 본질만을 추구하는 행위도 맹목 盲目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이 그러한 것처럼 실존하는 우리는, 실존을 통해서만이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몸을 비롯한 물질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또한, '본질을 알기 위해서' 또는 '기억해내기 위해서'라고 나는 믿는다. 또한 실존이야말로 본질로 다가갈 수 있는, 신이 주신 유일한 통로이거나 힌트로 나는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러한 실존이란 일찍이 철학자 칸트의 학설에서처럼, 우리가 알 수 없으며 단지 사유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유할 수 있다는 것, 이게 바로 추론을 의미한다. 그리고 과학적인 분야에서는 추론을 통해서 진실이 종종 드러나지만, 영성적인 분야에서는 추론이 추론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에겐 추론 이외에도 느낌이라는 게 있다. 추론을 통해서 도달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느낌을 통해서 본질에 도달할 수도 있음이다. 물론 느낌이라는 게 타인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느낌을 공유할 수는 있다. 또한 언어에 의한 제약이 있긴 해도, 논리적인 설명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영성적인 분야에도 가르치는 선생이 있고 배우는 학생이 있음이다. 느낌을 공유한다는 건 같은 수준일 때 가능한 것이고, 수준이 다를 땐 제한적일지라도 논리적인 설명을 통해 전달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실존만으로는 공허하기에, 우리는 본질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실존이라는 게 즉 우리 자신이 실존한다는 게, 하나의 추론이자 관념이라는 주장을 나는 지금 하고 있음이다. 물론 감각적인 체험도 병행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종합하면 우리는 감각적인 체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지만, 이는 하나의 추론에 의한 관념이라는 게 나의 주장이다. 물론 나는 나의 추론을 믿는다. 즉 내 몸뚱이를 비롯한 물질 우주가 실존한다고 본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환영 또는 허상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고체·액체·기체의 형태로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아울러 무형의 에너지 또는 기 氣라는 것의 존재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나는 추론을 바탕으로 이러한 확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가 믿고 있는 바와는 달리, 감각적으로 실재한다고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 있어 실존이란 어디까지나 하나의 추론이며, 나는 나의 추론을 믿는다는 얘기다. 결국 같은 얘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감각과 추론이 같을 수는 없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 감각을 믿고 또한 감각에 의지하여 살아가지만, 나는 나의 감각을 믿지 않는다. 감각이 늘 진실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동설을 배웠으며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시각적 광경도 받아들인다. 감각이 비록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는다 할지라도.

따라서 나는 감각보다 추론을 신뢰하고자 한다. 천동설이 감각이라면 지동설은 추론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감각을 맹신하던 자들의 폭력을 물리치고 진리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어쩌거나 지동설은 추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로 추론이라 해서 그 자체로 의심스러운 것은 아니다. 감각을 통해 얻은 경험이라 해서 믿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몸을 비롯한 우주의 존재를 추론한다고 해서, 그것의 존재를 의심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감각적 경험보다 추론에 의한 인식을 나는 더 확신하는 편이다.

이상으로 부제인 '실존은 추론이다'를 설명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인류 역사의 방향은 본질에 대한 추구에서 실존으로 흘러왔지만, 우리는 이제 다시 실존에서 본질에 대한 추구로 가야 할 것이다. 본질을 아는 게 곧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이 없는 함'이라는 말  (0) 2021.11.20
인간이 사고의 틀을 갖고 있다는 칸트의 이론에 대한 비판  (1) 2021.11.20
지금 여기  (0) 2021.11.18
깨달음의 소리  (0) 2021.11.15
신의 사랑 방정식  (0) 202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