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자기중심적인 사람

신타나몽해 2021. 12. 14. 08:46

자기중심적인 사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란,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기적이기 때문에, 즉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기적인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이기적이지 않은 이타적인 사람이란, 미친 사람이거나 정신 나간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자기중심적이 아니며 그렇다고 타인 중심적이지도 않은, 그야말로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중도를 걷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게 이기적인 행동이다. 이기적인 행동이든 이타적인 행동이든 그 모든 건 자신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가난하고 마음이 힘든 사람을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한다고 해서 그게 이타적인가? 스스로 기뻐서 행하는 게 아니라면 위선적인 행동일 뿐이며, 스스로 기뻐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라면 이게 어찌 자신을 위하는 이기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타인에게 헌신하고 봉사하는 이기적인 행동일 따름이다.

문제는 이기적인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행동에 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 행동의 극치를 보인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성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이다. 석가가 그랬고 예수가 그랬으며 소크라테스가 그랬다. 부모가 있고 또는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음에도 자기만족을 위해 살아간 사람들 아니겠는가.

다만 그들이 지금도 전 인류의 추앙을 받는 이유는, 자기중심적 삶을 통해 스스로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서 벗어난다는 얘기는, 극기 克己가 아니라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다. 자신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과 같아지는 것이다. 하나의 빗방울이 두려움 없이 바닷물이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음이다.

자신을 초월한다고 함은 자신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이 똑같아지는 것이다. 똑같아지는 것! 이게 바로 초월이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똑같아질 때,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거나 타인 중심적이 아닌, 중도를 걷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이다.

많은 성현의 가르침인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이 되라는 말은, 극도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된 다음에 결국 자신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같아지는 것, 이게 바로 해탈이고 구원이다. 또한 이게 바로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타인 중심적인 삶을 통해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깨달은 많은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타인 중심적인 삶은 밖을 바라보는 것인데 비해, 자기중심적인 삶은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면만을 바라보고 내면으로 들어간다는 얘기는, 자기중심적인 세계에 갇힌다는 얘기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자기중심적인 세계에서 바로 자신과 타인이 다를 바 하나 없음을 문득 깨닫게 될 수 있음이다. 이때가 바로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시작점이다. 깨달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히말라야 고봉을 정복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고봉 등정이라는 순간이 바로 끝이자 다시 처음이 되기 때문이다. 고봉을 등정하고 난 뒤 고봉에 계속 머물러 살 것 같으면 몰라도, 다시 하산할 것이라면 등정할 때와 똑같은 위험이 하산할 때에도 산재해 있지 않던가.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도 이와 마찬가지다. 깨달음의 세계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으며, 현실이라는 시장통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깨달음의 기쁨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의식주가 저절로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에서 현실로 돌아와 안착하게 되는 기간을 보림이라고 한다.

즉 자기를 벗어나거나 또는 초월한 상태에서, 다시 자기중심적인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주로 미국에서 불교 가르침을 편, 숭산 스님의 말씀인 0도에서 출발하여 360도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며, 중국 당송 시대 청원 선사의 말씀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와 같은 뜻이다.

180도쯤 깨달았을 때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라고 일갈하게 되나, 더 깨닫고 나면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임을 깨닫게 된다. 이게 바로 고봉에서 하산하는 길이며 깨달음에서의 보림인 것이다. 실제로 하산길에서 실종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것처럼, 보림 과정에서도 깨달음이 도로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튼 무사히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 고봉 등정에 성공한 것이듯, 깨달음이라는 고봉에서 하산하여 무사히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등산과는 달리 깨달음에 있어서 끝이란 없다.

깨달음이 깨달음을 낳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히 깨달아간다. 다른 대상을 깨닫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를 영원히 깨달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도, 자신의 생활을 영위해나갈 때 깨달음은 계속된다.

자기중심적이면서도 중도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중도적인 삶이 이타적이거나 타인 중심적인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지만, 더러는 타인 중심적인 삶을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중도적인 삶을 살곤 한다.

중도적인 삶을 살지라도 삶의 중심은 물론 자신일 수밖에 없다.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중도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고로 타인 중심적이라는 말도 사실 맞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과 같이 타인을 돌보는 사람을 타인 중심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만을 돌보는 삶을 살기 때문에, 타인도 함께 돌보는 삶이 타인 중심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서도 자신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간다. 어려서는 부모나 타인의 사랑에 목말라 하다가,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면서 내리 사랑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마치 열병에 걸린 것처럼,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게 바로 우리가 사람의 몸을 받아 고해 苦海의 삶으로 뛰어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내면을 돌아보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나서, 자신에게서 벗어나 초월적인 삶을 살고자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숙명적인 몸을 지닌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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