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유형적 무형

신타나몽해 2021. 12. 24. 10:25

유형적 무형


감각적 이미지 즉 상 像은 유형이면서 동시에 무형이다. 또는 유형적 무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상(이미지)이므로 유형적이지만, 그것이 우리 관념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기에 무형적이다. 이처럼 우리 몸이 지니고 있는 능력은, 이성적으로 판단해 볼 때 불가사의한 면이 있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현상이다. 유형이 무형으로 나타날 수 있다니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이, 유형으로 감각되는 무형인 것으로 유추할 수도 있음이다. 이게 바로 선각자들이 설파하는 바인, 현실 세계가 꿈과 같은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와 일치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유형의 사물이 무형의 관념인 이미지 또는 상으로 나타날 수 있음과 같이, 거꾸로 무형의 관념이 유형의 사물로 변할 수 있다는 추론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나 시크릿을 가르치는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말이다. 또한 이게 바로 불교 경전인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라는 구절의 내용이기도 하다.

유형적인 모습을 무형 즉 공의 세계에서도 떠올릴 수 있음은 대단한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였을지라도 말이다. 여기서 공 空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공은 무 無와는 다르다. 공이란 무가 아니라 무형 無形을 뜻한다. 무형의 세계가 바로 공의 세계다.

즉 공이란 형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반면, 무란 무형의 상태뿐만 아니라 관념조차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공의 세계에는 유형의 형상이 비어있을 뿐 무형의 관념은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다. 따라서 색의 세계가 바로 공의 세계이며, 역으로 공의 세계가 바로 색의 세계인 것이다. 색의 세계에서 모든 사물이 비어있는 상태가 곧 공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 나는 공이라는 고답적인 단어보다는 텅 비었다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둘은 결국 같은 상태를 나타낸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무 無가 절대계를 나타낸다면 공 空은 상대계를 나타내는 게 아닐까 싶다. 무에서 유 有와 공이 나왔으므로, 유와 공은 서로 호환적인 셈이다. 유는 공의 자리에서만 나타날 수 있으며, 유가 없는 공 역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이란, 유 또는 유형이 나타날 수 있는 관념적 공간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관념적 공간이란 현실에서의 공간처럼 어떤 물리적인 공간을 뜻하는 건 아니다. 다만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의 틀 안에 갇혀 있는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텅 비었다는 표현도 어차피 현실에서 사용하는 공간 개념을 차용한 것일 테니 말이다.

많은 영성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비유 중 하나인 영화관의 스크린과 영화도 마찬가지다. 스크린이 공이라면 영화는 유라고 할 수 있다. 공 空인 스크린 위에 유 有인 영화가 담기는 것이므로, 스크린이 없으면 영화가 상영될 수 없고 반대로 영화가 없으면 스크린은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이제 결론적으로 유형이 무형으로 지각되고 기억된다는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문득 자각하고 나니 대단히 기적 같은 일로 느껴진다. 유형적인 대상에 대한 이미지 또는 기억이 우리 관념 속에서는 무형적으로 나타난다는 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