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

2011' 제4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 賞 수상시

신타나몽해 2011. 10. 30. 19:30

  

 문장들

  

 김명인

 

 

 

  1

 

  이 문장은 영원히 완성이 없는 인격이다 

 

  2

 

  가을 바다에서 문장 한 줄 건져 돌아가겠다는

  사내의 비원 후일담으로 들은들

  누구에게 무슨 감동이랴, 옆 의자에

  작은 손가방 하나 내려놓고

  여객선 터미널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면 바다는

  몇 만 평 목장인데 그 풀밭 위로

  구름 양 떼, 섬과 섬들을 이어 놓고

  수평선 저쪽으로 몰려가고 있다

  포구 가득 반짝이며 밀려오는 은파들! 

 

  오만 가지 생각을 흩어 놓고

  어느새 석양이 노을 장삼 갈아입고 있다

  법사는 문장을 구하러 서역까지 갔다는데

  내 평생 그가 구해 온 貫珠 꿰어 보기나 할까?

  애저녁인데 어둠 경전처럼 밀물져

  수평도 서역도 서둘러 경계 지웠으니 저 무한대

  어스름에는 짐짓 글자가 심어지지 않는다 

 

  3

 

  윤곽이 트이는 쪽만 시야라 할까, 비낀 섬 뿌리로

  어느새 한두 등 켜 드는 불빛,

  방파제 안쪽 해안 등의 흐릿한 파도 기슭에서

  물고기 뛴다, 첨벙거리는 소리의 느낌표들!

  순간이 어탁되다, 탁, 맥을 푼다

  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상상 하나가

  싱싱한 배태로 생기가 넘치더니 이내 삭아버린다 

 

  쓰지 않는 문장으로 충만하던 시절 내게도 있었다

  볼만했던 섬들보다 둘러보지 못한 섬

  더 아름다워도

  불러 세울 수 없는 구름 하늘 밖으로 흐르던 것을,

  두 개의 눈으로 일만 파문 응시하지만

  문장은 그 모든 주름을 겹친 단 일 획이라고,

  한 줄에 걸려 끝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수평선이

  밤바다에 가라앉고 있다 

 

  4

 

  始原에 대한 확신으로 길 위에 서는

  사람들은 어느 시절에나 있다

  시야 저쪽 아련한 未踏들이

  문득 구걸로 떠돌므로 미지와 만난다는

  믿음으로 그들은 행복하리라

  타고 넘은 물이랑보다 다가오는 파도가 더 생생한 것, 

 

  그러나 길어 올린 하루를 걸쳐 놓기 위해

  바다는 쓰고 지운다, 요동치는 너울이고 고쳐 적지만

  부풀거나 꺼져 들어도 언제나 그 수평선이다 

 

  5

 

  일생 동안 애인의 발자국을 그러모았으나

  소매 한 번 움켜잡지 못해 울며 주저앉았다는 사내,

  그의 눈물로 문장 바다가 수위를 높였겠는가

  끝내 열지 못한 문 앞에서 통곡한

  사내에게도 맹목은, 한때의 동냥 그릇이었을까? 

 

  문장은, 막막한 가슴들이 받아안지만

  때로 저를 지운 심금 위에 얹힌다

  늙지 않는 그리움을 안고 산다면

  언젠가는 수태를 고지받는 아침이 올까? 

 

  6

 

  어둠 속에 페리가 닿고 막배로 건너온

  자동차 몇 대, 헤드라이트를 켜자 번지는 불빛 속으로

  승객들이 흩어진다, 언제 내렸는지

  허름한 잠바에 밀짚모자, 헝겊 배낭을 맨 사내 하나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진다

  혹, 문장을 구해 서역에서 돌아오는 법사가 아닐까

  그가 바로 문장이라면? 

 

  허전한 골목은 닫혔다, 바다 저쪽에서

  또 다른 사내들이 헤맨다 한들

  아득한 섬 찾아내기나 할까?

  일생 처녀인 문장 하나 들쳐 업으려고

  한 사내의 볼품없는 그물은 펼쳐지겠지만

  어느새 너덜너덜해진 그물코들!

  나는 이제 사라진 것들의 행방에 대해 묻지 않는다

  원래 없었으므로 하고많은 문장들,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단 하나의 문장! 

 

  구름에 적어 하늘에 걸어 둔 그리움 다시 내린다

  수많은 아침들이 피워 올린 그날 치의 신기루가 가라앉고

  어느새 캄캄한 밤이 새까만 염소 떼를 몰고 찾아든다

  그 염소들, 별들 뜯어 먹여 기르지만

  애초부터 나는 목동좌에 오를 수 없는 사내였다!

 

 

 

  계간 『세계의 문학』 2010년 여름호 발표  

 

 

 

 

인중을 긁적거리며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 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 뿐이라고 믿어 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보니,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삼일, 오일, 육일, 구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천사는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

 

 

 

계간 『문학동네』 2010년 겨울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