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3월에 내린 눈길 소묘

신타나몽해 2019. 10. 16. 03:28

3월에 내린 눈길 소묘

 

 

문득 달력을 보니 어제가 경칩이군요.

개구리가 나왔을까 하는 장난스런 생각도 듭니다.

제가 사는 남쪽 바다에 어제 눈이 펑펑 내렸거든요.

 

어릴 적 제 고향 부여에는 눈이 많이 내렸었는데

지금 살고 있는 이곳 진해에서는 눈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터라

지금도 눈이 내리나 하고 아침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길가에 쌓여 있는 눈만이 어릴 적 추억을 말해 주고 있네요.

 

어제저녁 부산에서부터 집으로 오던 길에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휘날리던 눈발은 어디로 갔는지

그저 햇빛만 조용히 반짝이고 있습니다.

차는 다니지 않고

뽀드득뽀드득 쌓인 눈 위를 걷던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던 한적한 옛날의 모습.

개구리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처럼 자가용도 아직 나오지 않았던 시절.

그 어릴 적 추억은 경칩 날 개구리 되어 흰 눈 위에 이미 나와 있네요.

밖에 나가봐야 할까 봐요.

어린 추억 속을 걷고 싶군요.

 

밟히는 눈에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지나가던 한 청년이 동백나무 위에 쌓인 눈을 손끝으로 톡 건드려 봅니다.

우수수 떨어지는 눈꽃송이들…

눈꽃은 마른나무 가지를 더 좋아하나 봐요.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눈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시내버스와 자가용 몇 대가 조심스레 발길을 내딛으며 달립니다.

일요일인데도 아침에 가야할 곳이 있는 사람들이겠지요.

 

눈꽃을 보며 조금 걷다 보니 '속천'에 다다릅니다.

속천에서 거제도로 가는 카페리도 있고 고기잡이배도 꽤 많지만

항구라기보다는 선착장 같은 곳입니다.

고깃배 위에 자동차보다도 더 많은 눈이 쌓여 있네요.

자그마한 낚싯배 위에는 참 예쁘게 눈이 쌓여 있군요.

 

그런데 바다엔 눈이 쌓이지 않았네요.

내리는 눈을 제 안에 담아서인지 바닷물이 더욱 깨끗해졌어요.

마치 시냇물같이 훤히 바닥이 다 보이네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비둘기 한 마리.

갑작스럽게 3월 초순에 내린 눈 때문에 아침밥을 찾을 수 없었는지

아스팔트 길에까지 내려와 먹이를 찾고 있네요.

눈 녹은 물에 씻긴 까만 아스팔트에 무슨 먹을거리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열심히 부리를 쪼고 있네요.

손에 먹이라도 들고 있었으면 던져 주고 싶은 제 마음을 알았는지

날아가지는 않고 길옆에 세워진 자동차 밑으로 종종종 걸어갑니다.

눈 내린 풍경을 그리며 모처럼의 아침 산책길에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같이 늘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2005. 3. 6. 자란 김석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