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지리산 산행기 ㅡ아름다운 환상의 세계 2

신타나몽해 2020. 1. 24. 04:04

벽소령 대피소에서 새벽 3시경에 잠이 깨었다가 결국 6시 반쯤에 길을 나섰다. 아직은 산길이 어둡다. 바로 엊그제 서울 서초동 검찰개혁 집회에 가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렸을 때 뭐 살 거 없나 하고 봤더니 헤드 랜턴이 눈에 띄어 자전거 타면서 앞에 헤드라이트 대신 쓰면 좋을 것 같아 하나 샀는데 그게 지금 산행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이것조차 신의 배려일까?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혼자만의 길은 7시쯤 되어서야 비로소 사방이 조금씩 밝아진다. 얼마쯤 더 가다보니 뒤에 젊은 남녀 바퀴벌레 한 쌍이 따라붙으며 묻기를 벽소령에서 왔느냔다. 그렇다고 하며 요즘 단식중이라 일찍 출발했다고 대답하며 그들에게 길을 비켜준다. 벌써부터 좀 지치기 시작한다. 세석대피소는 아직 멀었는데. . .

까마득한 급경사 계단길도 한군데 있어 중간중간 쉬며 꾸준히 올라간다. 신이 내게 계속 기운을 보충해 주므로.

오늘 산행의 시작인데도 그렇게 겨우겨우 도착한 세석. 산행을 시작한 어제 아침과는 사뭇 다르다. 여기서 나는 아무 망설임없이 세 갈래 길 가운데 제일 가까운 하산길인 백무동 방향을 택한다. 정말 아무 망설임없이. ㅎㅎ

세석에서 백무동으로 가는 첫 구간은 정말 깍아지른 듯한 돌계단 길이다. 계곡물도 흐르지 않고 삭막한 풍경을 지나 한 시간 이상 내려오니 비로소 계곡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여전히 만만치 않은 경사의 돌계단 길을 계속 내려오다 보니 뒤에서 아까 본 바퀴벌레 한쌍이 또 따라붙는다. 이들은 세석에서 점심을 해먹고 내려오느라 다시 내 뒤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쯤에서 길이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구간을 만나 옆으로 지나오다가 마지막 쯤에서 결국 미끌어져 뒤로 벌러덩했으나 뒤에 맨 배낭 때문인지 몸이 옆으로 눕혀지면서 바로 일어날 수 있었다. 자빠진 김에 사진 한 방 찍고. ㅎ

옆에 보니 커다란 바위 아래 고드름이 많이 달려있다. 조심조심 다가가 고드름 하나 따먹고.

이후 하염없는 길을 계속 내려간다. 다행히 이때부터는 한신계곡이라고 이름 붙은 계곡물을 바라보며 내려올 수 있어 좋다.

뱀사골 계곡 못지 않게 멋진 풍광이다. 계곡물 속 바위 옆에 달라붙어 마치 꽃잎처럼 핀 얼음꽃 하며 거꾸로 솟은 고드름까지 있다.

어제와는 다르게 마주치는 등산객을 더러 볼 수 있다. 아마도 서울 쪽에서 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은 세석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고 나는 백무동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지만 아직 멀었다는 대답만이 돌아온다.

지난 연말에 그만 둔 자활센타에서 지급받아 모셔두었던 새 안전화를 등산화 삼아 신다보니 발목까지 올라오는 신발이 바깥 복사뼈 부근의 근육에 닿아 점점 아파온다. 산행 전전날 미리 신어보고 테스트 해봤기에 오른쪽 복사뼈 부근에는 집에서 뒹구는 압박 붕대를 펴서 몇 번 접어 양말 속에 넣어두었더니 괜찮은데 이번엔 왼쪽 발목 쪽이 자꾸 아파온다. 할 수 없이 손수건을 꺼내 접어 넣어도 통증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어제 화개재에서 벽소령 쪽으로 오면서 등과 엉치 부분이 좀 결리길래 걸으면서 신에게 이 통증을 없애 달라고 기도했더니 잠시 후 통증이 사라지는 경험이 있어 오늘도 기도를 했으나 오늘 발목 통증엔 안 먹힌다. 계속 손수건 위치를 바꾸다가 오른쪽 압박 붕대와 위치교대를 해도 오른쪽은 멀쩡한데 왼쪽은 여전하다.

가다가 통증이 느껴지면 멈춰서서 붕대의 위치를 바꿔보고 또 바꿔보고. . .

그렇게 내려오면서 문득 통증이 발목에서 느껴지는 게 아니라 통증의 신호만 발목에서 내보낼 뿐 실제로 통증은 머릿속 뇌에서 느끼는 것이라는 자각 (마치 소리가 차의 크락션에서 나는 게 아니라 귀의 고막 안에서부터 나는 것처럼)이 들었지만 아픈 건 통증의 신호를 보내는 발목 부분을 고쳐주어야만 한다. 통증을 느끼는 머리속을 망치로 두드려 깨 통증을 못느끼게 하거나 최면이나 명상으로 잠시 동안은 통증을 못느끼게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이토록 오랜 시행착오 끝에 겨우 왼쪽 발목의 통증이 거의 멎도록 붕대를 고쳐 댔을 때는 중간 정도 내려온 다음이다. 세석에서 백무동까지 6.5키로의 거리인데 참 멀다. 중간에 백무동의 유래가 적힌 표지판을 보니 옛날에는 여기가 지리산의 기운이 쎈 곳이라 100 여명의 무당들 (요즘 말로는 무속인)이 항상 있던 곳이라 하여 백무동이라 한다는. . .

그리고 백무동의 계곡 이름은 백무동계곡이 아니라 한신계곡이다. 뱀사골의 계곡 이름은 그대로 뱀사골계곡인데. . .

이름이야 어떻든 계곡을 따라 보이는 경치는 지리산의 3대 계곡에 뽑힐 만하다. 뱀사골계곡, 한신계곡, 그리고 칠선계곡.

이중 한신계곡과 마찬가지로 함양군 마천면에 위치한 칠선계곡은 가보질 못했으니 일단 나의 가보고 싶은 곳 즉 소위 버킷리스트에 적어둔다.

이윽고 백무동에 이르러보니 길옆 가게 유리창에 시외버스 시간표가 적혀있는데, 버스 시간은 다 되었는데 버스는 코빼기도 안보인다. 이 새끼들이 손님 없다고 버스를 빼 먹나 하는 쌍팔년도식 생각을 하면서. ㅎㅎ

할 수 없이 평소 알고 지내는 지리산문학관의 학예사에게 전화를 했더니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있어 가기 힘들다는 거다. 정말 바쁜가? 아님 오기 싫다는 얘긴가? 순간 여기서 인월로 가서 남원으로 그냥 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게 바로 랜드마크 포럼에서 가르치는, 일어난 일에 대한 내 해석일 뿐이라는 것. ㅎ)

잠시 후 다시 휴대폰이 울리고 데릴러 올테니 그냥 있으란다. 안와서 남원으로 돌아가게 되면 서운할 뻔했는데. ㅎ

그래서 길따라 계속 내려가는데 한 5분쯤 더 걸어 가니 거기에 버스터미날이 있고 버스도 2대나 서있다. 음~~~

중간에 학예사 후배 차를 만나 지리산문학관으로 오는 길은 역시 멀게 느껴졌다. 시간은 25분 정도의 거리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해서 어제보다 3키로 정도 적은 거리를 오히려 어제보다 30분 정도 더 걸린 9시간 30분만에 내려온 끝에, 나로서는 대장정인 지리산 산행의 막이 내렸다.

씻고 어제 오늘 총 다섯 끼를 금식한 끝에 (강장제 3개씩 아침 저녁으로 먹을 때 함께 먹는 구기자즙과 사과즙 그리고 물 조금 마시며 금식) 저녁은 함양 시내 갈국수와 수제비를 반반 섞어서도 파는 이른 바 '칼제비'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칼제비! ㅎㅎ

저녁 먹고 나니 만사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이 된 줄 알고 깨어보니 밤 11시 반이다.

약 12시부터 2시간 넘게 집이 아닌 곳에서 벽에 기대어 앉아 이 글을 적고 있다. 다 나의 기쁨이다. 신과의 에너지 핫라인이 열린 느낌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지금쯤 여전히 한밤중일텐데. 잠도 많이 없어지고 피곤한 몸도 금방 회복된다.
역시 깨달음은 좋은 일이다.

환상의 세계에서 한발짝 벗어나 환상을 바라보며 그 환상을 즐기고

환상이 허망하거나 헛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아름답고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멋진 환상임을 알고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다만 의도를 가지거나 소망할 뿐이고 또는 다만 선택할 뿐이고 (이게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나의 뜻은 무조건 신에 의하여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진 다음 숙성시간 (우주와 합일되는 동안 걸리는 시간)이 지난 다음 신의 뜻은 다시 나의 의지로 발현된다.

우리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나의 자유의지가 아닌 신의 뜻이 나의 의지로 발현되는 것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우리 인간은 다만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한 것을 의도하거나 소망하는 것일 뿐

그 선택한 의도에 대한 실행의지는 신의 뜻이 인간인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의지로 발현되는 것이라는 얘기다. 이 부분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나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이다. 나에게 다가오는 진리인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진리로 받아들여졌을 때 비로소 그의 진리가 될 수 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님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단상 또는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처럼 바람처럼  (0) 2020.02.17
빗소리 들으며  (0) 2020.02.16
지리산 산행기 ㅡ아름다운 환상의 세계  (0) 2020.01.24
3월에 내린 눈길 소묘  (0) 2019.10.16
시랄까 단상이랄까  (0) 2013.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