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지리산 산행기 ㅡ아름다운 환상의 세계

신타나몽해 2020. 1. 24. 04:00

어제는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 검찰개혁 시위에 참여하고 집에 내려오니 밤 11시가 되었다.
그런데도 이것저것 하다가 새벽 2시 넘어서 잤나?
그리고는 오늘 아침 6시쯤 잠에서 깨어 이것저것 하다가 7시 못되어 집을 나섰다.

시외터미날 정류장에서 뱀사골 가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뱀사골 입구에 8시 50분쯤에 도착하여 산행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거의 평길이고 뱀사골 계곡 따라 데크로드가 설처되어 있어 걷기에 어려움이 없다.
여름보다는 수량이 많이 줄었지만 뱀사골 계곡은 역시 멋지다.

이윽고 지리산 본령 중의 하나인 화개재를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화개재를 지나 어제 예약한 세석 대피소로 가야 하는데 밥도 안먹고 (다이어트를 위해 요즘 내멋대로 단식 중) 계속 걷는데도 연하천 대피소를 지나 가다보니 벽소령은 2.4키로 남았고 세석은 무려 7.8키로 남았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5시가 다 돼가는데. . .

간간이 눈바람이 치기도 하고 능선에는 계속 눈길이라 걷는 것도 매우 조심스럽다. 앞에 간 사람들의 아이젠 자국을 보며 나는 그냥 간다. 아이젠 꺼내 차기도 귀찮고 좀 힘든 구간이 있지만 그냥 걸을만 하므로.

이윽고 벽소령에 6시경 도착하여 세석대피소 예약한 것을 이쪽으로 옮기면 안되느냐고 했더니 그렇게는 안되고 여기서 별도로 요금을 내야 한단다. 숙박비 12,000원에 담요 2장 대여료 4천원을 보태서.
그리고 세석대피소에 결재 취소한 것은 30%만 환불된단다. ㅎ

아무러나 장장 9시간을 계속 걸었기에 대피소에 눕자마자 1시간은 꼼짝 못하고 누워있다가 이제 다시 기운이 보충되어 일어나 글을 쓴다.
처음 와보는 대피소 안.
남녀가 같이 군대내무반 비슷한 2층 침상에 누워있다.
다행히 사람은 별로 없어 한 사람 눕고 세 사람쯤 건너뛰어 또 자리를 잡고 있다.

원래 계획은 내일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지리산문학관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오면서 문득 함양이 아니라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로 하산하고 싶어졌다. 천왕봉을 거쳐가든 아니면 장터목 대피소에서 바로 하산하는 길로 가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볼 일이다.

그리고 한 가지는,
엊저녁 새벽 2시쯤에 내가 올린 글에 달리는 댓글에 산길을 걸어가면서 답글 쓰면서 하다가 마지막 채영님 글을 보고는 체력이 떨어져 더 이상 답글은 달지 못하고 나한테 무슨 자기규정이 있어서 내 생각과 반대되는 정치 관련글을 보면 화가 나는지를 생각해봤다.

거기엔 "나는 상당히 논리적인 사람이다", 라는 자기규정이 있었다.
나 스스로 논리적으로 완전하다고 규정하고 있기에 무논리적이고 감정적인 정치 관련글을 보면 화가 나는 것이다.

걸으면서 이러저러한 생각을 거쳐내린 결론은 "모든 것은 괜찮다"였다.
이방원의 하여가처럼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모든 게 신의 뜻이라면
무조건 고맙고
그냥 고맙고
이유없이 고맙고.
"나는 상당히 논리적인 사람이다"라는 남들이 보기엔 얼토당토 않을 자기규정만 내려놓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대피소의 밤이 깊어간다.
조금 전 소등을 했고 다들 자는 모양이다.
밖에서는 지붕을 훓는 듯한 바람소리가 지나간다.
이 세상이 환상이지만 허망한 환상이 아니라 참으로 아름다운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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