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물처럼 바람처럼

신타나초 2020. 2. 17. 09:51

그제는 밤새도록 빗소리가 들렸는데 어제 낮부터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던 눈이 밤새 소리 없이 쌓이고, 모처럼 마음을 내본 아침 운동길에도 쏟아지는 눈 때문에 눈을 뜨기가 어려워 얼마쯤 가다가 이내 되돌아왔네요. 되돌아오는 길에도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눈송이들의 집단적인 위세가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두어 달 전쯤 내렸던 첫눈에 이어 올 겨울 들어 두 번째 눈이네요. 더구나 일어나 보니 밤새 쌓인 눈만이 아니라 아침에도 이렇게 펑펑 쏟아지는 눈을 온몸으로 맞아보는 건 정말 십 수년만에 처음인 것 같습니다.

겨우내 포근한 날씨 때문에 꽝꽝 언 얼음판 위에서 벌어지는 송어축제도 이번 겨울엔 열리지 못했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비 온 다음날에 이어 눈이 쏟아지는 날씨는 참으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창문을 통해서 내다보는 바깥 풍경은 정말로 낭만 그 자체입니다.

소나무 위에는 한 폭의 산수화가 담겨있고 멀리서 보이는 점멸하고 있는 두 개의 등불도 겨울동화인 듯 포근합니다. 어쩌다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과 그 앞에서 사선을 그으며 저항하는 눈발조차 옛날의 추억 같은 풍경입니다.

오늘도 카페에 가서 요즘 들어 즐겨 마시는 보이차를 마시며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사놓고도 읽지 않은 밀린 책들이 많습니다. 읽히지 않는 책은 다시 덮어두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부터 열심히 읽어야겠습니다. 모든 게 시절 인연이라는 생각이 짙어지는 요즘입니다.

예전 같으면 모든 게 내가 이겨내야 하고 견뎌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다면, 지금은 때가 되면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리라는 마음이자 믿음입니다. 내가 의도를 갖고 있으며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딱 맞는 시기에 의욕과 열정이 내게 일어나 그 일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기에 힘들다고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할 일이라고는 내게 일어나고 닥치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며 오직 감사하는 마음과, 그리고 내 마음의 보물상자 안에 담아 마음 깊이 처박아 둔 자기규정이라는 쓰레기를 찾아내어 버리는 일입니다. 살아가다가 보면 어쩌다 내 안에 있는 자기규정이 문득 생각날 때마다 이를 글로써 적어두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등등…

마음으로 부탁할 수 있는 무형의 존재를 호명하며
"ㅇㅇㅇ님! 제가 그동안 소중하게 여겼던 쓰레기, 저 자신에 대한 자기규정을 모두 가져가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며 아침저녁으로 일정한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방법을 저는 즐겨 씁니다.

소위 말하는 정체성! 이런 거 다 스스로 치워야 할, 지금까지 보물처럼 애지중지 했던 쓰레기일 뿐입니다. 정체성! 영어로 얘기하면 뭔가 더 있어 보이는 아이덴티티!
이게 바로 자기규정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죄수로 만들어버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입니다.

정체성 즉 남들이 보는 시선이나 평판에 스스로 얽매여 자기규정이라는 감옥에 제 발로 들어갔으니 이제는 제 발로 걸어 나올 때입니다. 나 스스로 나를 규정하는 아무것도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자기규정이라는 쓰레기는 자신도 모르게 매일 생기는 것이니 이것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마음속에 붙잡을 게 아무것도 없을 때, 그리고 혼자 설 수 없을 때,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또는 무형의 절대자를 붙잡고서라도 일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의 발목을 잡는 자존심이 바로 자기규정이기도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데, 내가 누구였는데, 라는 오래전 케케묵은 자기규정 때문에 부질없는 자존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눈 내리는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칩니다. 자기규정이라는 먹구름을 치워버리고 햇볕을 만끽합시다. 자기규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날마다 탈출하는 용기를 낼 때입니다. 물처럼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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