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길을 걸어가는 것은 내 의식이 내 몸을 통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내 의식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갈 때 우리는 두 가지 형태를 느끼거나 알 수 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면 밖의 풍경이 스쳐지나감을 느낍니다. 반면 시선을 거두고 생각을 해보면 밖의 풍경이 뒤로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라, 내가 탄 차가 빠른 속도로 앞으로 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상황인데도 왜 우리는 두 가지 상황으로 인식하게 될까요?
같은 상황이지만 전자는 시간이며 후자는 공간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밖의 대상이 움직이는 걸 우리는 시간이라고 표현하며, 반면 밖의 대상은 가만히 있는데 내가 움직이는 걸 우리는 공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기차든 자동차든 우리는 차 안에 가만히 앉아있습니다.
밖을 내다보며 풍경이 뒤로 스쳐 지나간다고 느끼는 것이나, 생각을 안으로 돌려 내가 탄 차가 앞으로 가는 것임을 아는 것은 모두 상대적 감각이며 앎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채 생각조차 잠시 멈추면, 비록 내가 탄 차가 빠른 속도로 움직일지라도 차 안에서 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차창밖 사물이 지나가는 것은 감각 즉 시각적 앎이며, 밖의 풍경이 뒤로 가는 게 아니라 내가 탄 차가 앞으로 가는 것임을 아는 것 역시 자신의 감각적 경험과 학습을 통해서 알게 된 지식입니다. 반면 차가 움직일지라도 나는 언제나 차 안에서 그 자리임을 아는 것은 자각입니다.
여기서 지식과 자각의 차이점은, 지식은 학습에 의해서 습득되는 것인데 반하여 자각은 학습이 아닌 스스로 깨우침에 의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최초의 지식은 학습이 아닌 깨우침에 의한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처음 주창한, 지동설이 바로 자각에 의한 지식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사물 즉 대상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차가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달릴지라도 차 안에 있는 나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게 바로 현존입니다.
고로 모든 감각 자체와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이 상대적 앎이라면, 현존이라는 자각은 절대적 앎입니다. 상대와 절대의 차이점은, 다른 대상을 통해서 나를 아는 것은 상대적 앎이며, 다른 대상과 비교함이 없이 나 자신을 통해서 나를 아는 것 즉 스스로 아는 것(자각)이 바로 절대적 앎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대적 앎에 치중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절대적 앎입니다. 상대적 앎을 내세우지 않을 때 즉 상대적 앎을 잠시 자신의 옆에 두거나 선반 위에 올려놓았을 때, 절대적 앎이 점차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절대적 앎은 내가 추구해서 얻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알고자 머리를 싸맨다고 알아지는 게 아닙니다. 머리를 싸매고 추구할 때 우리에게는 상기증이 올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것과는 무관심하게 지낼 때 얻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끝없이 추구하다 지쳐서 단념했을 때, 그냥 단념하는 게 아니라 기꺼이 항복했을 때, 우리의 추구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무의식 속으로 들어갑니다. 표면의식에서 잠재의식으로 잠재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추구하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표면의식에서 사라지고 잠재되었을 때, 책을 읽든가 동영상을 듣든가 또는 무슨 소리를 듣다가 문득, 자신을 깨닫는 절대적 앎을 얻게 되는 일이 생기곤 합니다. 즉 절대적 앎은 내가 깨닫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창밖을 내다보면 밖의 풍경이 스쳐지나감을 느낍니다. 반면 시선을 거두고 생각을 해보면 밖의 풍경이 뒤로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라, 내가 탄 차가 빠른 속도로 앞으로 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상황인데도 왜 우리는 두 가지 상황으로 인식하게 될까요?
같은 상황이지만 전자는 시간이며 후자는 공간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밖의 대상이 움직이는 걸 우리는 시간이라고 표현하며, 반면 밖의 대상은 가만히 있는데 내가 움직이는 걸 우리는 공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기차든 자동차든 우리는 차 안에 가만히 앉아있습니다.
밖을 내다보며 풍경이 뒤로 스쳐 지나간다고 느끼는 것이나, 생각을 안으로 돌려 내가 탄 차가 앞으로 가는 것임을 아는 것은 모두 상대적 감각이며 앎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채 생각조차 잠시 멈추면, 비록 내가 탄 차가 빠른 속도로 움직일지라도 차 안에서 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차창밖 사물이 지나가는 것은 감각 즉 시각적 앎이며, 밖의 풍경이 뒤로 가는 게 아니라 내가 탄 차가 앞으로 가는 것임을 아는 것 역시 자신의 감각적 경험과 학습을 통해서 알게 된 지식입니다. 반면 차가 움직일지라도 나는 언제나 차 안에서 그 자리임을 아는 것은 자각입니다.
여기서 지식과 자각의 차이점은, 지식은 학습에 의해서 습득되는 것인데 반하여 자각은 학습이 아닌 스스로 깨우침에 의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최초의 지식은 학습이 아닌 깨우침에 의한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처음 주창한, 지동설이 바로 자각에 의한 지식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사물 즉 대상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차가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달릴지라도 차 안에 있는 나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게 바로 현존입니다.
고로 모든 감각 자체와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이 상대적 앎이라면, 현존이라는 자각은 절대적 앎입니다. 상대와 절대의 차이점은, 다른 대상을 통해서 나를 아는 것은 상대적 앎이며, 다른 대상과 비교함이 없이 나 자신을 통해서 나를 아는 것 즉 스스로 아는 것(자각)이 바로 절대적 앎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대적 앎에 치중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절대적 앎입니다. 상대적 앎을 내세우지 않을 때 즉 상대적 앎을 잠시 자신의 옆에 두거나 선반 위에 올려놓았을 때, 절대적 앎이 점차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절대적 앎은 내가 추구해서 얻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알고자 머리를 싸맨다고 알아지는 게 아닙니다. 머리를 싸매고 추구할 때 우리에게는 상기증이 올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것과는 무관심하게 지낼 때 얻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끝없이 추구하다 지쳐서 단념했을 때, 그냥 단념하는 게 아니라 기꺼이 항복했을 때, 우리의 추구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무의식 속으로 들어갑니다. 표면의식에서 잠재의식으로 잠재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추구하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표면의식에서 사라지고 잠재되었을 때, 책을 읽든가 동영상을 듣든가 또는 무슨 소리를 듣다가 문득, 자신을 깨닫는 절대적 앎을 얻게 되는 일이 생기곤 합니다. 즉 절대적 앎은 내가 깨닫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