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다

신타나몽해 2021. 1. 29. 15:32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다


요즘 들어 주변에 지인이 하나둘씩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예전 같으면 '나도 머지않아 죽게 될 텐데'라는 생각에 다소 의기소침해지겠지만, 육십이 넘은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른 감정입니다.

예전 국민학교 시절 3학년 때 운동회 하는 날이었습니다. 운동장을 왔다 갔다 하던 나는 갑자기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지은 적이 있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메멘토 모리'라는 라틴어를 굳이 쓰지 않아도, 우리는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며 또한 언젠가 생이 끝나는 날이 있음을 자각하는 때가 옵니다. 다른 사람의 글에서도 보면 대개 10살 전후에 이렇게 자신과 자신의 죽음을 처음으로 자각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죽음에 대한 최초의 자각 이후 우리는 간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애를 쓰게 됩니다. 내 경우에도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소년 시절부터 시작해서 40대 후반의 나이까지 어쩌다 한번씩이지만 계속해서 들곤 했습니다.

해답이 없을 것만 같았던 의문이 50이 가까워지던 나이 즈음 답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어디 다른 곳에서 와서 또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지금 여기로 가는 것이라는 사실이, 점차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 이후로 10여 년이 더 지난 60대 초중반인 지금에 와서는, 죽음이라는 게 몸의 죽음일 뿐 내 몸이 곧 나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확연해졌습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썩어도 거기서 새싹이 땅을 비집고 솟아나는 것처럼, 우리 몸뚱이가 죽고 썩어 없어진다 해도 우리 자신인 생명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제는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만큼 분명합니다.

내 몸뚱이 안에 삶과 죽음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이지, 유형의 몸뚱이가 아닌 무형의 존재인 내 안에는 오로지 삶만이 있으며, 또한 나는 생명 그 자체라는 사실이 이제는 불을 보듯 환하게 보입니다. 내 몸이 씨앗일 뿐 나는 씨앗이 아니라, 씨앗 안에 깃든 생명이라는 사실이 이젠 지극히 자명합니다.

더욱이 내 몸의 수명조차도 내가 스스로 정하는 것일 뿐이라는, '신과 나눈 이야기'와 '람타'라는 책에 나오는 얘기를 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100세 정도가 아니라, 두세 배쯤 되는 나이에 스스로 육체적 삶을 마감하고자 합니다.

물론 내 의도가 그렇다 해도, 내가 언제 육체적 삶을 마감하게 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 내 몸뚱이가 언제 죽음을 맞게 될지 몰라도, 나는 영원한 무형의 생명이기에 아무런 걸림이 없습니다.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미련도 없으며, 가족이나 친구 등 주위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그냥 받아들일 뿐이며, 다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도를 가질 뿐입니다.

의지가 아니라 의도를 갖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고봉을 오르겠다는 의지를 갖고 체력단련 등 모든 것을 열심히 준비하는 게 아니라, 그냥 히말라야 고봉을 바라보며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준비하고 계획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내가 의도한 바를 스스로 이루어보겠다며 지금까지 육십 평생 힘들게 살아왔지만 이렇다 하게 이루어놓은 것 하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방향을 바꾸어 나는 의도만을 가진 채, 나머지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서 맡겨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를 신이나 부처, 영혼 또는 다른 무엇이라 이름한 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차피 이름일 뿐인데요.

첫머리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육체적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면 이제는 쓸쓸함이 느껴집니다. 내 몸의 죽음을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와의 관계에서의 애증이 앞으로는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의 쓸쓸함입니다.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한 명씩 사라진다는 사실이 이제는 쓸쓸함이라는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그렇다 해도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듯이, 만나고 헤어지는 게 자연의 법칙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겠습니다. 연배가 비슷한 또래 친구야 편하고 좋지만, 내게 쓸쓸함만을 전해줄 것이므로 나보다 젊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야겠습니다. 내가 생의 날개를 접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어도, 그다지 쓸쓸함을 느끼지 않을 나이 또래의 젊은 친구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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