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 시작되다
견성이란 본성을 본다는 뜻을 가진 단어인데, 이는 곧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됨을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 선종에서는 견성성불이라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죠. 그러나 성불成佛이란 해탈解脫과 같은 뜻으로, 이는 견성 옆이거나 견성과 비슷한 단계가 아니라, 견성 즉 깨달음에서 시작해서 한참을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하는 전혀 새로운 단계입니다. 깨달음이 몸에 체화되었을 때 그때가 바로 해탈의 순간이라고 할 것입니다.
해탈이란 우리 몸과 마음이 영혼과 함께, 삼위일체가 되는 순간이며 이러한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 바로 그것이 될 수 있음입니다. 그리고 견성(깨달음)이란 해탈의 시작이거나 출발일 뿐 어떠한 완성이 아닙니다. 방식이 돈오頓悟든 점오漸悟든 상관없이 깨달음(견성)이란, 해탈의 길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해탈이란 깨달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여정이며, 해탈로 가는 여정을 우리는 점수라고 이름하기도 합니다.
나 개인적으로도 깨달음이 시작된 시점에서부터 1년 반이 지난 지금에서야, 해탈이 무엇인지에 대한 영감이 왔으며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내 직관으로는 깨달음이 아니라, 해탈이 우리 자신인 영혼의 궁극적 목표라는 느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깨달음이란 결승점이 없는 마라톤의 시작점일 뿐입니다. 가다가 아무 때고 해탈을 하게 되면 거기가 바로 결승점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나 견성은 마지막 골든벨이 아니라, 해탈이라는 궁극을 향해서 가는 마지막 출발을 알리는 시작종인 셈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 역시 어느 한순간에 벼락 치듯 번쩍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작은 깨달음(점오) 다음에 오는 마지막 깨달음(점오 또는 돈오)일 뿐입니다. 이를 비유로 말하자면, 우리가 배고플 때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것 같아도, 사실은 수저로 한 입씩 퍼서 먹다 보니 어느새 밥 한 그릇 다 비워진 것입니다.
그러니 돈오, 돈수, 점오, 점수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태아도 열 달의 준비(점오) 끝에 어느 순간 탄생(돈오)하는 것이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는 건 아니지 않나요? 점오가 계속 이어지는 상태에서 마지막 점오를 특별히 돈오라고 표현할 수는 있어도, 밑도 끝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돈오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돈오 후에는 깨달음의 공부가 끝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돈오란 마지막 점오일 뿐이며 돈오 후에도 점수의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히말라야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고 해서 설산 위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0도에서 180도로 갔으면 다시 360도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것처럼, 다시 하산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산하는 과정이 바로 점수입니다.
점수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자각이 점차 안정되고 세밀해지며 폭이 넓어집니다. 고로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것은 당송시대 청원선사의 어록에 나오는 것처럼 산이 산이 아니요 물이 물이 아니라는 경지일 뿐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경지로 가기 위해서는 점수를 거쳐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맺는다면, 깨달음(견성)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깨달음 자체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며 동시에 해탈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록 시작과 출발점이기는 해도 깨달음이란 매우 중요하고도 기쁜 순간입니다. 깨달음과 해탈로 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한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엄청난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