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고미안용사

신타나몽해 2021. 2. 2. 22:49



고미안용사


오늘 있었던 일이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온 통지서를 보고는 동네 내과 의원에 대장암 검사를 받으러 갔더니, 간호사도 퇴근했는지 원장인 듯한 의사 혼자 있는데, 대장암 검사받으러 왔으니 용변 담는 통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여기저기 찾다가는 지금 없다며 나중에 다시 오란다.

한 달여 전인 작년 12월에도 예의 내과를 방문했으나 접수창구에 앉아있는 간호사가 대장암 검사가 많이 밀렸다며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해서, 용변통이라도 지금 달라고 하니 그것도 안 된다고 해서 그냥 돌아오면서 기분이 좀 상했었는데, 오늘 또 그러므로 짜증이 나서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그냥 다시 오라고만 하면 됩니까? 라며 사과를 요구했으나 내과 원장은 오히려 내게 왜 언성을 높이냐며 따지고 달려든다. 나는 어이가 없어 더 고함을 지르다가 잠시 후 언성을 높인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다며 낮은 톤으로 얘기했는데, 그는 여전히 사과 한마디 없이 내가 언성을 높인 것만을 반복해서 들먹인다.

그냥 참고 의원 문을 나오는데 그가 계단까지 따라 나오며 자기가 잘했다고 얘기한다. 계단에 서서도 서로 누가 잘했는지 계속 따지다가, 한참 후 그가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오는 일이 있었다.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내게 일어난 생각의 움직임이다.

내가 거기서 화를 낸 것도, 그가 나를 화나게 만든 것도 모두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길을 걸으면서 의사를 떠올리며 '호오포노포노'에서 가르치는 '미용고사'를 되뇌다가 문득 '고미안'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나는 혼자서 '고미안'에서 '안'이 무슨 뜻일까 하고는 자문을 해보았다.

잠시 후에 든 생각이지만 '고'는 고맙습니다. '미안'은 미안합니다. 다음에 '용'은 (그만) 용서하세요. 마지막 '사'는 사랑합니다. 이를 첫 글자만 모으니 '고미안용사'가 되었다. 나는 앞으로 이용고사나 미용감사 대신에 고미안용사를 외우고 다닐 것이다.

이윽고 집에 와서 내가 사는 전북 남원에서 다소 먼 곳인 서울에 사는 여친에게 전화해서, 앞에 있는 대로 내과 의원에서 있었던 일과 걸어오면서 혼자 했던 행동 등을 얘기하자, 자기 같으면 나처럼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고 다르게 대응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건 사실 일종의 회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얘기를 끝까지 듣고 난 뒤에 내게 다가오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깨달음이었다.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 흥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냉정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주장을 얘기한단다. 그렇다. 나는 머릿속으로는 나와 남의 견해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몸으로는 아직 이를 체득하지 못한 것이다.

내 기준에 맞지 않는 상대방의 행동이란 일어나서는 안 되며, 혹시 그런 행동을 했을 때에는 즉시 스스로 이를 알아차리고 사과를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다. 누구든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며, 손꼽기 힘들 정도로 입으로는 떠들어대면서도 말이다.

나는 앞으로 오늘 같은 상황에서 화를 벌컥 낼 게 아니라, 그 의사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얘기할 것이다. 지난 번에 왔었으나 간호사가 바쁘다고 다음에 또 오라고 해서 한달 여만에 오늘 다시 왔는데, 오늘은 용변통이 없다며 당연하다는 듯 다음에 또 오라고 하니 제가 좀 화가 나는군요. 이럴 때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다음에 또 오라고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결론적으로 그 내과 의사는 나에게, 나는 그 의사에게, 여친은 내게 고마운 스승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 오늘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스승이 되어줄 사람과 다투게 되는 것 같다. 거기서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도 있으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서로 감정의 앙금만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하고 가까운 가족 또는 친구이거나 연인이든, 그도 아니라면 사회생활에서 부딪히는 모든 사람이 내게 고마운 스승임에 거의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사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나하고 서로 부딪히는 사람이 바로 내 영혼의 스승인 것이다.

'단상 또는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라는 보물찾기  (0) 2021.02.16
사랑은 난향처럼  (0) 2021.02.07
절망이란 없다  (0) 2021.01.31
나를 찾아서  (0) 2020.10.27
중도中道  (0) 2020.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