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또는 수필

중도中道

신타나몽해 2020. 10. 10. 11:13

중도中道


자신의 능력 밖이라고 모든 걸 포기할 때까지,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능력을 알 수 없다. 그런데 모든 걸 포기한 뒤에도 우리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지를 끝내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하면서도 바로 그 포기하는 마음은 포기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게 바로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것이요, 벼랑 끝에 매달린 나뭇가지를 잡은 한 손마저 놓는 것이며, 은산철벽을 마침내 뚫어버리는 것임에도 말이다.

모든 걸 포기하는 마음마저도 포기해야 정녕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모든 걸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포기 자체도 포기했을 때, 마치 허공에 붕 뜬 것처럼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게 날 수 있다.

6년간의 목숨을 건 수행 정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고타마 싯다르타는,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한 끝에 기진하여 길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다가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지나가던 처녀가 먹여준 죽을 먹고는 몸의 기력을 회복한 뒤, 어느 날 새벽 문득 별을 보다가 꿈에도 그리던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가 경험한 깨달음의 과정이 바로 중도이다. 모든 희망을 버린 뒤 절망했을 때, 마지막 남은 희망인 절망마저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얻은 뒤 최초로 행한 석가모니의 가장 큰 가르침인 중도이다.

고락苦樂, 유무有無, 선악善惡 등과 같은 이분법적인 관념을 버리는 건 나중의 일이며, 석가모니가 말한 중도란 생사와 관련된 일이다. 기독교를 신앙하던 철학자 키엘케고르가 일찍이 설파한 대로,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조차도 내려놓는 게 바로 중도이다.

희망과 절망 모두를 내려놓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날아오를 것 같은 자유로운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아무런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아무런 구속도 느끼지 못한다.

희망이 사라지는 것 즉 절망하는 것이 곧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며, 반대로 절망조차 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보겠다는 것이다.

모든 걸 포기하면서도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는 것! 이런 이율배반적인 명제가 바로 석가모니가 말한 중도이다. 예약된 국왕 자리도 마다하고 출가한 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절망감으로 인하여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깨어난 바로 그 순간, 석가는 절망도 버린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전히 절망감을 가슴 깊숙이 부둥켜안은 채,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살려냈느냐?"고 고통스럽게 소리칠지도 모를 일이다.

절망을 버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반면 희망을 버리기는 오히려 쉽다. 삶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절망했을 때 우리는 절망을 계속 붙잡고 있으려 하거나, 아니면 이미 사라진 희망의 바짓가랑이를 다시 붙잡으려 애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눈물로 호소한다. 절망으로 괴로운 사람들이여! 이미 놓아버린 희망도, 그리고 지금 고통스럽게 붙들고 있는 절망도 모두 내려놓으시라. 지금 절망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유를 향해 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시금 희망 한 조각이라도 붙잡으려는 어리석음을 버려라. 그리고 절망을 계속 붙잡고 있으려는 더 큰 어리석음을 지금 당장 버려라. 이 모두를 버렸을 때 우리는 중도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자유의 세계를 날 수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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